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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팀이 만리장성을 넘었다 탁구

‘핑퐁외교’라는 말이 있다. 적대국가로 교류가 없었던 미국과 중국이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탁구 대회에 참석한 후, 미국 탁구단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수교를 트게 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 핑퐁외교라는 말은 이후 적대적 상태에 있다가 화해무드가 조성될 때 흔히 쓰는 말인데, 탁구를 통해서 남북한도 ‘핑퐁외교’라고 할만 한 화해무드를 조성한 적이 있다.

1991년 코리아팀의 쾌거

1991년 1-2월 판문점에서 남북체육회담이 열렸다. 안건은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할 선수들의 단일팀 구성에 대한 것이었고, 몇 차례 회의 끝에 합의를 이끌어 냈다. 남북한 합의의 첫 시도로 1991년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탁구팀이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하고 '코리아'란 이름으로 출전하였다. 이 코리아 탁구팀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결성된 단일팀이었다. 남북 각각 31명(임원 22명, 선수 9명)씩 총 62명으로 구성되었다. 하늘색 ‘한반도기’가 남북한의 국기를 대신해 사용되었고, 남북한 국가 대신 ‘아리랑’을 불렀다.
이 대회에서 코리아팀은 여자 단체전에서 중국과 숨막히는 접전 끝에 우승을 거두는 쾌거를 거두었다. 한국과 북한이 따로 출전했을 때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겨보지 못한 중국이었다. 한국은 1973년 이후 18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것이었고 북한은 처음이었다. 남북한 선수들은 이념을 넘어 하나가 되어 승리를 축하하며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일본) 참고 이미지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일본)(1991)
제4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 참가결과 참고 이미지
제4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 참가결과(1991)

우리나라 탁구의 역사

탁구는 발생지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남아프리카, 인도 등 영국 식민지에 살던 영국인들이 만들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테니스에서 힌트를 얻어 더위를 피하여 실내에서 놀 수 있는 유희로서 방바닥에 네트를 설치하여 볼을 넘기고 받는 데서 탁구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탁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24년 일본을 통해서였다. 1924년 1월 경성일일신문사 주최 핑퐁경기대회가 그 처음이었는데 그 다음해 제2회 대회에서는 3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탁구는 도입 이후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도입된 지 4년만인 1928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제1회 조선탁구대회’를 개최하였고 1932년 메이지신궁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광복직후인 1945년 11월에는 ‘조선탁구협회’가 발 빠르게 발족되어 전국선수권대회를 개최, 국제 진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우리나라는 1952년부터 국제대회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20여년 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우리나라 탁구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기였다. 이에리사, 정현숙 등이 주축이 된 여자탁구가 당당히 우승을 거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단체전에서 우승을 거둔 것이었다. 당시 19세였던 이에리사는 단숨에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정부에서도 세계대회 우승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각종 환영 행사를 개최하는 등 전 국민이 탁구로 하나가 되기도 했다.

세계제패여자탁구선수단 환영대회 참석 참고 이미지
세계제패여자탁구선수단 환영대회 참석
(1973)
한국여자탁구 세계재패 참고 이미지
한국여자탁구 세계재패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재패)
(1973)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파견 한국대표 선수단 개선환영대회계획(안) 참고 이미지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파견 한국대표
선수단 개선환영대회계획(안)(1973)

이후 탁구는 중국, 일본과 어깨를 당당히 겨루는 세계 강호의 대열에 끼었다.
1986년과 1988년은 한국 탁구역사에 있어서 화려한 전성기였다. 김완, 안재형, 유남규 등의 남자 선수와 양영자, 현정화 등이 주축이 된 여자선수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마음껏 펼치며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에서 메달을 거둬들였다.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자단체전, 여자단체전, 개인단식의 유남규 등이 우승을 하였으며, 은메달 1개, 동메달 6개를 획득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에서는 여자복식에서 양영자, 현정화, 남자단식의 유남규가 각각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후 198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유남규, 현정화가 혼합복식에서 우승했고 1990년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자단체와 여자복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현정화가 여자단식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한편 1991년 탁구단일팀 ‘코리아‘의 우승은 남북한 스포츠 교류의 가능성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같은 해 6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도 남북 단일축구팀이 참가, 8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일궈냈다. 그러나 이후 단일팀 구성은 남북한 최종 협상 타결을 앞두고 여러 차례 좌절, 성사되지 못하다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4년 아테네올림픽,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 개·폐회식에서 남북한이 동시 입장하기도 하였다.

탁구여자복식 우승자인 양영자와 현정화선수의 경기장면 참고 이미지
탁구여자복식 우승자인 양영자와 현정화선수의 경기장면
(1988)
탁구 남자 단식 메달 수여식 참고 이미지
탁구 남자 단식 메달 수여식(1988)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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