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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에는 없어진 일이지만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쥐잡기 운동’ 이 있었다. 요즘의 젊은 세대들은 ‘쥐잡기’ 라고 하면 컴퓨터나 모바일 게임을 생각할테지만, 1970~80년대에는 진짜 쥐를 잡아 많이 잡은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기도 했다. 가정, 학교, 직장, 군대,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이 ‘쥐잡기 운동’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남겼다.

전국적인 쥐잡기 운동의 시작

쥐는 곡식을 먹는 등 피해를 주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해를 주는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1960~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쥐는 가뜩이나 부족한 양곡을 훔쳐 먹는 박멸해야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1960년대 시나 군단위로 이루어지던 쥐잡기가 전 국민 운동으로 커진 것은 1970년 1월 26일 6시 ‘전국 쥐잡기 운동’을 실시하면서 부터이다.

70년도 제2차 쥐잡기 사업 실시 계획 보고 참고 이미지
70년도 제2차 쥐잡기 사업 실시 계획 보고(1970)

농림부는 이 날의 행사를 위해 전국 540만 가구에 20g씩 쥐약(인화 아연)을 공짜로 주었다. 여기 들인 예산만 1억4천만 원이었다. 당시 농림부가 추산한 우리나라의 쥐는 9천만 마리였다. 인구 1인당 세 마리, 한 집 평균 18마리 꼴이었다. 쥐가 먹는 식량은 한해 약 240만 섬, 240억 원 어치로 당시 곡물 총생산량의 8%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전주시민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정부는 잡은 쥐의 꼬리를 학교나 관공서로 가져오면 쥐꼬리 하나 당 연필 한 자루씩 바꾸어 주거나 복금 당첨권을 주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다소 웃음이 나지만, 당시에는 쥐꼬리를 잘라가는 학생도, 이를 검사하는 공무원, 교사도 무척 진지했다고 한다.
공짜 쥐약 배포와 문화영화 등을 통한 계몽, 포상으로 인해 제1회 전국 쥐잡기 운동은 그 결과가 괜찮았다. 쥐약을 뿌린지 20일 만인 2월 19일 농림부는 모두 41,541,149마리의 쥐를 소탕했다고 밝혔다. 전국의 학교, 관공서 등에서 수집한 쥐꼬리를 세어본 숫자였다.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2차 대회를 같은 해 5월 15일 실시했다. 이번에는 일반 가정뿐만 아니라 공공건물, 정부창고, 병영 등에까지 확대하였다.
문화영화 등을 통해서 쥐가 가져오는 피해로 양곡 손실뿐만 아니라 위생의 문제도 있음을 강조했고, 쥐약을 놓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교육하였다. 쥐를 잡는 방법으로 쥐약을 놓기 3~4일 전에 쥐약이 들어있지 않은 미끼를 쥐가 잘 다니는 곳에 두어 의심이 많은 쥐가 쥐약을 먹을 수 있도록 하고,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여 다른 먹을 것을 남기지 않아야 하며, 전국적으로 같은 날 쥐약이 섞인 미끼를 두어 더 많은 쥐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알렸다. 2차 쥐잡기에서는 32,000,000마리가 잡힌 것으로 추계됐다.

쥐를 잡자 참고 이미지
쥐를 잡자(1970)
쥐를 잡자 참고 이미지
쥐를 잡자(1971)

이듬해인 1971년 3월 25일에는 3차 전국 쥐잡기를 실시했다. 이번에는 무상으로 쥐약을 배급했을 뿐만 아니라, 사업홍보를 위한 포스터를 제작하고 차량과 통행이 많은 곳에는 표어를 붙이기도 하였다. 1972년은 쥐띠 해였는데, 이 해도 쥐잡기 운동은 열기를 더해갔다. 학교는 쥐잡기 포스터 공모대회와 쥐 박멸 웅변대회를 열었고 표어를 공모했다. 거리에는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 쥐를 잡아 없애자”, “일시에 쥐를 잡자. 쥐약 놓는 날, 0일 오후 7시” 등 구호 아래 쥐가 쌀가마니를 앞발로 쥐고 갉아먹는 그림을 넣은 포스터가 전국에 붙여졌다. 그해 12월엔 한국 쥐잡기운동본부가 ‘쥐 없는 명랑한 사회를 건설하자’를 주제로 전국 남녀 웅변대회를 서울 YMCA 강당에서 열기도 하였다. 1972년 쥐잡기 운동에서는 47,286,027마리 쥐를 잡아 목표대비 91.4%의 실적을 올렸으며, 1,198,569석의 양곡손실을 방지했다고 정부는 발표했다.

쥐잡기운동 관련표어가 적힌 현수막 참고 이미지
쥐잡기운동 관련표어가 적힌 현수막
(1972)
쥐잡기운동 관련표어가 적힌 조형물 참고 이미지
쥐잡기운동 관련표어가 적힌 조형물
(1972)
쥐잡기운동 관련포스터3 참고 이미지
쥐잡기운동 관련포스터3(1972)

동참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

쥐잡기는 농촌에서는 양곡손실 등의 문제로 호응도가 높았지만,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서는 농촌에 비해 참여도가 낮았다. 농촌은 쥐잡기 운동을 계속 실시하고 무상으로 쥐약을 배급하기를 바랐지만, 도시의 경우는 받은 쥐약도 놓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각종 음식점이나 유흥가 등에서는 영업시간과 관련되어 쥐약 놓는 것을 피하고, 도시의 일반 가정에서는 애완용 가축이 이를 잘못 먹고 죽는 경우가 왕왕 발생해 쥐약 놓기를 기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71년도 제1차 쥐잡기사업보고서 안건제출 참고 이미지
71년도 제1차 쥐잡기사업보고서 안건제출
(1971)
제2차 쥐잡기사업실시계획 참고 이미지
제2차 쥐잡기사업실시계획
(1974)

전국 일제 쥐잡기 운동은 1970년대를 넘어 1980년대에도 계속됐다. 초창기처럼 학교에 쥐꼬리를 가져가 점검을 받는 일은 사라졌지만 정부에서는 1년에 2번 연중행사로 대대적인 쥐잡기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정부차원에서 대대적으로 벌인 쥐잡기 운동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쥐를 접할 기회가 적어졌었고 양곡도 이전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시설에서 철저하게 관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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