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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정・부통령 선거를 조작하자 선거결과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항거를 ‘4.19 혁명’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익숙한 ‘4.19 혁명’이라는 명칭과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야 했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견뎌야 했다. 지금의 민주화는 4.19혁명의 희생자들과 그 정신을 잊지 않고자 했던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대한뉴스 제266호] 4.19 순국 학도 합동 위령제(1960, CEN0000184(1-1))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제266호] 4.19 순국 학도 합동 위령제(1960)

4.19 혁명, 독재정권에 맞선 의로운 항거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마산에서 발생하였고, 경찰은 이를 강경진압하였다.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발견되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차별적으로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학생들의 희생을 묵과할 수 없었던 대학교수들도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시위에 동참하였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이렇게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렸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 4.19의거 혁명 데모(1960, CET0042917(2-1)) 참고 이미지
  • 4.19의거 혁명 데모(1960)
  • 4.19 부상학생 함의원 의사당 앞 데모(1960, CET0042922(3-1)) 참고 이미지
  • 4.19 부상학생 함의원 의사당 앞 데모(1960)

잔인한 4월의 시작, ‘미완의 혁명’으로 불리다

1960년 5월, 「4.19순국학도 합동위령제」, 「4.19의거 기념연주회」 등이 개최되며 4.19 혁명을 추념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다음해 4.19혁명 1주년이 되자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대학들은 기념탑과 기념비 제막식을 진행하고, 음악회, 예술제 등으로 4.19 혁명을 기념하고자 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한일협정, 유신체제, 독재정권 등 굴곡의 현대사를 경험하면서 4.19 혁명 정신을 외치는 소리는 집권세력과 부딪히며 저항세력, 반정부세력으로 규정되었고, 인고의 세월을 지내야 했다.

[대한뉴스 제412호] 4.19 기념비 건립(1963, CEN0000330(6-1))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제412호] 4.19 기념비 건립(1963)

‘4.19 학생묘지’에서 ‘국립4.19민주묘지’로

초기 ‘4.19 사태’, ‘4.19 학생데모’, ‘4.19 의거’, ‘4.19 혁명’ 등으로 불렸던 학생들의 항거는 1973년 ‘4.19 의거’로 정의되었고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4.19의거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1963년 9월 20일 곳곳에 흩어져서 보관되고 있던 4.19 혁명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유리 합동묘지로 이장하였는데 이 때 4.19혁명기념탑 제막식도 거행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 만 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라.”

- 4.19혁명기념탑문 이은상 글 -
4.19혁명 제3주년 기념행사계획(안)(1963, BG0000348(2-1)) 참고이미지
4.19혁명 제3주년 기념행사계획(안)(1963)

문민정부가 출범한 첫 해에 김영삼 대통령은 4.19 33주년을 맞이하여 ‘4.19 묘지’를 참배하였고, 같은 해 12월 ‘4.19 혁명 기념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동시에 ‘4.19 묘지’에 대해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1995년 ‘4.19 35주년’에 맞추어 국립묘지로 승격시켰다. 1997년에는 4.19혁명기념관이 개관되어 우리나라 민주이념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묘지의 관리와 소유권은 서울시에서 국가보훈처로 완전히 변경되었다.

한 때 너무나 초라했던 4.19 혁명기념 행사와 성의없는 묘지관리로 많은 이들로 울분을 토하게 했던 적이 있었다. 해마다 4월이 되면 매운 연기가 대학가와 묘지를 휘감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자유롭게 사이버 분향을 하고, 가족단위로 기념관을 찾아 ‘그 날’과 ‘그 정신’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있다. 4.19 혁명 희생자들과 그 정신을 잊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붙들었던 이들의 노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집필자 : 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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