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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대륙에 우뚝 솟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남극세종기지

가장 늦게 인간의 발길을 허락한 대륙, 남극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북반구에 있는 넓은 땅덩어리와 균형을 이루려면 남쪽 어딘 가에 큰 대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5세기 최초의 항해 일주를 한 포르투갈의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을 비롯해 많은 탐험가들이 전 세계 바다를 일주했지만, 남극 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1820년 러시아의 파비안 고틀리에프 폰 벨링스하우센(Fabian Gottlieb von Bellingshausen)이 지금의 ‘프린세스 아스트리드 코스트’ 연안에 발달해 있는 빙붕(氷棚, 남극 대륙을 뒤덮은 얼음을 타고 흘러 내려와 바다 위로 퍼지며 평평하게 얼어붙은 것)을 목격하면서 남극 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으로 기록됐다.

1911년 노르웨이의 아문젠(Roald Amundsen)은 마침내 남극점에 도달했고, 남극점을 정복하기 위해 ‘세기의 대결’을 벌인 스콧(Robert Falcon Scott) 일행은 그보다 한 발 늦게 도달한 뒤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도중에 모두 얼어 죽었다. 백색의 대륙, 남극은 지구상 어느 곳보다 늦게 인간의 발길을 허락한 대륙이다. 지구에서 가장 춥고, 가장 건조하며, 가장 바람이 세게 부는 땅, 남극은 남극 대륙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남극해로 이뤄졌다. 연평균 기온 영하 55℃. 가장 따뜻한 달이 영하 30℃, 추운달의 평균기온이 영하 70℃, 여름엔 밤이 두 시간 안팎인 백야가 계속되다가, 겨울엔 반대로 밤만 20시간 넘게 지속되는 ‘극지’가 바로 남극이다.

그러나 남극은 석유는 물론이고, 남극 횡단산맥의 석탄매장량만 해도 1천500억 톤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과 함께 구리, 크롬, 백금, 니켈, 아연, 은, 주석, 금, 철 등이 상당량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잠재적 가치가 무궁무진한 곳이다. 특히 남극새우(크릴)는 미래 식량자원으로서 세계 각국의 주목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 연구의 중심지이자 극한지역 연구를 위한 초석이다. 그야말로 자원의 보고이자 미래 연구의 중심지인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남극탐험대와 오찬 썸네일 이미지
전두환 대통령 남극탐험대와 오찬(1985)
남극탐험기념 조형물을 주고받는 윤석순 남극탐험대장과 김성진 과학기술처 장관 썸네일 이미지
남극탐험기념 조형물을 주고받는 윤석순
남극탐험대장과 김성진 과학기술처 장관(1985)

1989년 세계 18번째로 남극에 상주기지를 가져

우리나라의 남극 진출은 1978년 남극해에서 크릴새우를 조사한 것이 시작이었다. 수산청이 출어 경비의 반을 부담하기로 해 처음으로 남빙양의 크릴을 시험 조업하러 떠난 남북수산은 1978~1979년에 걸친 어한기에 남극 엔더비 랜드와 월크스 랜드 근해에서 크릴 511톤을 어획했다. 어획량은 많지 않았으나 남극으로 내딛은 첫 번째 발자국이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 남극조약에 가입해 국제사회에 진출하려는 의욕에 차 있었다. 1985년 11월 16일부터 12월 10일까지 민간단체인 한국해양소년단연맹이 두 팀으로 나누어 남극탐험에 나섰다. 이때 한국해양연구소에서 두 사람의 연구원이 참가해 킹조지 섬에서 3주를 머물며 외국기지 건설에 대한 조사와 킹조지 섬의 자연환경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우리의 남극기지건설에 대비한 준비였다. 한편 함께 떠난 해양소년단연맹이 위촉한 전문 등산인들은 1985년 11월 29일 남극 최고봉인 빈슨 메시프(Vinson Massif, 4,897m) 등정에 성공했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였다.

[남극을 가다] 1985년 한국해양청소년단 남극탐험대의 여정과 남극 생태계 조사활동 썸네일 이미지
1985년 한국해양청소년단 남극탐험대의 여정과 남극 생태계 조사활동(1986)

다음 해인 1987년 초 신년업무보고에서 외무부가 남극 연구의 중요성과 기지건설의 필요성을 보고하자 대통령의 지시로 3월에 해양연구소에 극지연구실이 설치되어 남극연구와 관련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해양연구소에서는 과학자들과 기술자, 대사관 참사관으로 구성된 답사반을 4월 23일부터 5월 7일까지 킹조지 섬에 보내 기지를 세울 후보지를 답사케 했다.

이후 남극기지 건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는데, 기지의 설계와 감리는 현대엔지니어링이 맡고, 건설자재와 장비운반은 현대중공업이, 건설은 현대건설이 맡았다. 8월 말 인천에서 건물 짓는 연습을 하고, 10월 6일 ‘HHI 1200’호에 자재와 장비들을 싣고 울산을 떠났다. 건설선은 12월 15일 킹조지 섬에 도착, 다음 날 기공식을 가졌다. 공사는 남극의 여름기간을 이용해 지어야 하기 때문에 휴일 없이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때로는 새벽 2시까지도 일했다. 그 결과 2개월 하루 만인 1988년 2월 17일 서울로부터 1만 7,240km 떨어진 킹조지 섬 바톤 반도의 남위 62°17’, 서경 58° 47’ 해안에 남극세종기지가 준공되었다. 당시 남극에는 미국, 러시아, 영국, 일본 등 세계 14개 국의 과학기지가 진출해 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보다 40년이나 늦었지만, 세계에서 18번째로 남극 상주기지를 가진 나라가 된 것이다.

[세계 한민족의 삶] 남극(세종기지) 썸네일 이미지
남극(세종기지)(1996)

2014년 2월 12일 남극에 세종기지를 지은 지 26년 만에 우리나라는 ‘장보고 과학기지’를 준공했다. 두 번째 남극기지이자 남극대륙 내륙에 지은 첫 기지이다. 이로써 종래의 남극의 세종기지는 해양환경, 연안생태, 연안기반 연구에 집중하고, 장보고기지는 빙하, 운석, 오존층, 기상관측 등 대륙기반 연구의 전진 기지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장보고기지의 완공으로 우리나라는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칠레, 아르헨티나, 호주, 인도 등에 이어 세계에서 열 번째로 남극에 두 개 이상의 상설기지를 보유한 국가가 됐다.

남극조약 가입, 북한과 동시가입은 거절

미국, 영국, 일본, 소련 등 선진 과학국들은 남극의 풍부한 부존자원과 자연환경의 실험장으로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59년에 워싱턴에서 ‘남극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961년 6월23일 남극조약이 발효됐다. 남극조약 조문은 모두 14개 항으로 구성되었으며, 남위 60도 이남 지역에서는 군사 사용을 금지하고 평화적으로만 이용할 것을 명시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영토권은 아예 유예시켜 어느 나라도 남극을 자국의 영토로 소유할 수 없게 했다. 대신 과학조사 활동은 자유롭게 하면서 그 조사 결과도 서로 교환할 수 있도록 했다. 남극을 보호하기 위해 핵실험은 물론 어떠한 방사능 유출이나 발암물질을 처분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도 빠지지 않았다.

[국무회의록] 남극조약 가입 썸네일 이미지
남극조약 가입(1986)

우리나라는 1985년 민간단체의 남극관측탐험이 성공하자, 1986년 남극조약 가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극조약 협의당사국들의 규정으로는, UN회원국은 원하면 자동으로 남극조약에 가입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UN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당사국 전원의 찬성을 얻어야만 가입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가입신청을 하자 소련과 중공 등의 나라들은 북한과 동시가입을 제안했고, 이는 1978년부터 남빙양조사와 크릴조업 등의 업적이 있는 우리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그러나 남극조약 협의당사국들을 상대로 한 설득과 미국의 중재로 1986년 11월 28일 세계에서 33번째로 남극조약에 가입하였고, 1989년에는 남극조약 당사국 자격도 획득했다. 북한은 1987년 35번째로 가입했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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