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12일, 막바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결연한 자세로 국내외 보도진과 중계방송카메라 앞에 섰다. 사람들은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텔레비전 앞에 모여 화면을 지켜보았다. 세상은 바야흐로 오랜 군사정권을 끝내고 문민정부로 바뀌었을 때였다.
텔레비전에서는 사람들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폭발력을 지닌 대통령의 발표가 흘러 나왔다.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 발동! 우선 그 제목부터가 생소하고 무시무시했다. 그날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시각 이후 누구도 가명(假名) 혹은 무기명에 의한 금융거래를 금지하고, 실명임을 확인한 후에만 거래가 이루어지는 제도를 전격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극단조치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이 법을 위반하지 않고 금융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인지. 과연 내 통장은 안전한 것인지. 금융기관 거래가 많지 않은 사람들이야 잠시 그러고 말았지만 기업과 같은 법인에서는 한 마디로 바짝 움츠러들었다. 특히, 정계와 재계에서는 이 갑작스런 조치에 아연실색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지금까지의 금융거래 질서를 하루아침에 확 바꾼다는 개혁 중의 개혁, 경제개혁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이같은 한국정부의 발표를 긴급타전, 순식간에 전 세계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이러다간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입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실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부터 저축 장려를 위해 예금주의 비밀보장, 가명, 차명(借名) 혹은 무기명에 의한 금융거래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남의 이름을 빌리거나 가짜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사용해왔다. 이것은 곧 탈세의 한 방편이 되기도 했고, 부정부패와 청탁의 수단이기도 했으며,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칫 비실명거래를 허용하지 않거나 돈줄을 캐면 오히려 저축이 위축되고 지금까지의 경제발전이 왜곡되거나 후퇴할까봐 문제를 알면서도 섣불리 손을 못 대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자 각종 금융 비리사건과 메가톤급 부정부패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금융실명제의 도입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실제로 1982년에 일어난 소위 ‘이철희, 장영자 부부’의 어음사기사건으로 당시 전두환 정권은 울며 겨자 먹기로 금융실명제를 꺼내 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됐다. 희대의 사기사건을 벌인 그들이 바로 대통령과 인척관계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에서는 1982년 7월 3일 마지못해 금융실명제실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때 제정된 「금융실명제에 관한 법률」은 종합과세제도와 자금출처조사제도가 빠져 있었고, 비실명 금융자산에 대한 차별적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실명금융거래의 의무화도 연기되었다. 말하자면 핵심이 빠진 유명무실한 법이 되어버렸다. 이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8년부터 다시 정부는 금융실명제준비단을 설치해 연구를 계속했지만 이 역시 이런저런 이유와 각종 우려를 내세우는 반대세력에 부딪쳐 보류되고 말았다.
그러던 금융실명제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8월 12일을 기해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로 전격 실시되기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을까. 그때 한 언론사가 대학생들을 상대로 실시한 1993년도 100대 스타여론조사에서는 당대의 연예 스포츠계의 쟁쟁한 스타들을 제치고 김영삼 대통령이 단연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영어 이니셜을 딴 ‘YS는 못 말려’라는 책이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때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던 금융실명제를 화끈하게 밀어붙인 그의 저돌적인 뚝심과 개혁에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금융실명제 실시문제는 김영삼 후보의 대선공약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취임 후 1993년 6월에 당시 부총리를 불러 이 작업을 하는데 2개월 정도면 될 거라는 소릴 들었다. 대신 일시적인 증시폭락과 경제성장률 하향은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과 시장의 혼란을 막기 위한 완벽하고 철저한 비밀유지였다. 먼저 이 작업에 참여하는 핵심공무원들의 사표부터 받았다. 개중에는 진짜 미국출장을 가는 줄 알고 나섰다가 공항에서 납치돼온 사람도 있었다. 일이 끝나고 각자 부서로 돌아갈 때는 마치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여행 가방을 끌고 나타나기로 했다. 007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보안은 유지되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작업이 끝나 역사적인 금융실명제의 실시에 들어갔다.
헌법 76조 제1항에 의거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으로 발동해서 추후 만장일치로 국회의 승인을 받았다. 지하경제를 끌어내고, 정경유착 등으로 생기는 부정과 부패의 고리를 끊고, 조세합리화로 탈세를 예방하고, 결국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수사도 가능해졌다. 문민정부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금융실명제는 비록 그 성과가 완결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날부터 우리나라는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여 경제정의와 투명성 확보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