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연구단지는 대전광역시 북쪽에 자리잡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학연구단지이다.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은 1968년에 수립된 ‘과학기술개발 장기종합계획’(1967∼1986년)에서 처음으로 거론되었다.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각종 연구기관들을 한 지역에 집적시켜 상호간의 연구시너지를 기하자는 의도였다.
당시 남북관계는 준전시상태나 마찬가지였다. 1968년 북한 무장특공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100여 명의 무장공비가 1개월 이상 침투했던 울진·삼척 침투사건, 1969년 미 공군기 격추 사건에 이어 1970년에도 간첩·간첩선 침투가 잇따랐다. 이 와중에 미국의 해외 주둔군 감축 방침이 발표되면서 우리의 국가 안보가 위협을 받고 있었다. 우리 군의 장비는 북한의 3분의 1수준에 불과했다. 현대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진국 수준의 중화학공업과 기술·기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당장 전문 연구기관을 세우는 게 시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7월, 김학렬 부총리에게 방위산업 육성계획을 마련토록 지시했다. 그때까지 정부는 1967년 4월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과학기술처를 발족하고, 1966년에 홍릉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 공업교육 강화, 기능 올림픽 참가 등으로 방위산업 저변을 확충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중심으로 한국과학원,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한국개발원, 국방과학연구소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정부가 세운 선박해양연구소, 표준연구소, 화학연구소, 기계금속시험연구소, 전자기술연구소 등 주요 산업연구소들과 민간 연구기관을 수용하려면 홍릉 연구단지 보다 더 넒은 면적의 제2 연구단지가 필요했다.
1973년 ‘연구학원도시건설기본계획’에 따라 정부는 충남 대덕, 경기 화성, 충북 청원 등 세 곳의 후보지 가운데 대덕을 낙점했다. 선정 이유로는 충남 대덕군 일원은 우리나라 중심부에 위치한 대전을 모(母) 도시로 하는 지역으로,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및 철도 간선이 분기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우수 두뇌들의 집결이 용이하며 전국의 산업기지와의 연결이 편리하여 각 공업단지에 대한 기술지원이 용이하고, 금강을 옆에 끼고 있어 용수의 공급과 처리 등 연구 환경이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대덕연구단지의 조성은 1975년부터 단지개발과 연구기관 입주가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1978년에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를 비롯한 13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입주했다. 이어 삼성, 현대 등 민간기업연구소들이 속속 입주하기 시작했다. 1985년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시행자로 지정되면서 단지 건설이 본격화되고, 전자통신연구원(1985), 지질자원연구원(1987) 등이 들어서 비로소 과학연구단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89년에는 단지 일대가 엑스포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단지 건설에 가속도가 붙었다.
대덕연구단지 건설 사업은 1970년대 초부터 1992년까지 22년간 약 1조 원이 투입돼 마침내 1992년 11월 대덕연구단지 조성 준공식을 했다. 834만 평의 면적 위에 60여 개의 연구기관과 2만여 명의 연구 인력으로 시작한 대덕연구단지는 국가연구개발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혁신창출의 메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애초에는 생산시설이 허용되지 않는 연구‧학원도시로 출발했지만 1999년 「대덕연구단지관리법」의 개정으로 연구개발의 실용화 및 벤처기업의 입주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2000년을 전후해서는 국내에 벤처붐이 불면서 대덕에도 각종 벤처기업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IT(정보 기술, Information Technology), BT(생명공학, Bio Technology) 산업을 중심으로 창업투자사들도 벤처 창업과 투자 등을 위해 대덕에 지사를 설치하기도 했다. 정부는 2000년 9월 대덕연구단지를 산·학·연 복합단지로 발전시키기 위해 ‘대덕테크노밸리’ 선포식을 가지고 2001년부터 대덕연구단지와 인접한 곳에 대덕테크노밸리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대덕테크노밸리는 지방 산업단지의 일종으로 대덕연구단지의 연구소에서 나오는 연구성과물을 상업화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2003년에 출범한 참여정부는 동북아 연구개발허브의 구축을 강조하였다. 대덕연구단지도 설립 30주년이 됨에 따라 지난 30여 년간 106조 원의 가치를 창출한 대덕연구개발특구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2004년 3월 국정과제 보고회의를 통해 대덕연구개발특구에 대한 지원책이 강구되었고, 2005년 1월 「대덕연구개발특구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연구개발을 통한 신기술의 창출 및 연구개발 성과의 확산과 사업화 촉진’을 주 기능으로 한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출범했다. 대덕연구개발특구는 기존의 대덕연구단지에 대덕테크노밸리와 대전 3, 4산업단지를 모두 포함한 총 2,130만 평(여의도 면적의 8.4배)을 대상지역으로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혁신클러스터로 도약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요람, 대덕연구단지는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데, 특히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물인 CDMA(이동 통신에서 코드를 이용한 다중접속) 기술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1996년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하여 100조 원 이상의 시장유발 효과를 창출했다. 이외에도 와이브로(Wibro), 지상파DMB 원천기술 개발에 이어 초고속 이동통신기술(NoLA)을 개발하는 등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우주공학에서는 우주 발사체 개발을 위한 과학로켓 KSR-III의 시험발사, 스마트무인기 개발, 우리 손으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우리별까지 세계 수준의 과학기술이 태어난 것이다. 이외에도 세계에서 3번째로 탄생한 달리는 로봇 ‘휴보’, 생명공학, 초미립자기술, 에너지환경기술 등 각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1973년 1월 대덕연구학원도시 개발 계획에 의해 1992년 대덕연구단지로 완성되었고, 2000년에는 대덕테크노밸리로, 그리고 2005년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이어져온 대덕연구개발특구는 다양한 분야의 과학성과를 바탕으로 2011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로 확정되었다.
현재 입주기업 3,000여 개, 매출액 33조 원, 벤처기업 집적도 1위, 고용 13만 4,000명, 기술이전 1,400건, 코스닥 등록 기업 59개, 연구소기업 106개, 대학 5개, 정부출연연구소 등 공공연구소 41개, 박사 28,000여 명이 대덕연구개발특구에 모여 있다. 2013년 40주년을 계기로 새로운 도약시기를 준비하고 있는 대덕연구개발특구는 앞으로도 ‘한국 과학의 메카'로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쾌적한 기반시설을 뒷받침해야 할 과제가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