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몇해련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1934년 발표된 가요 ‘타향’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가수 고복수를 단번에 인기가수로 만들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노래가 발표될 당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할 수 밖에 없는 식민지 조선인의 현실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타향살이를 가장 절실하게 느낀 사람들은 특히나 해외이주민들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 2015년 외교통상부가 발표한 재외동포 현황에 따르면, 전체 181개 국 중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가 285만 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미국으로 223만 명, 일본 85만 명, 캐나다 22만 명, 우즈베키스탄 18만 명 순이다. 재외동포 700만 시대의 시작은 19세기 중반부터였다.
1901년은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다. 몇 년째 계속된 흉년의 타격이 1902년 절정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기근과 빈곤, 일제의 억압을 피해 많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중국, 러시아,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중국으로 이주한 동포들은 해란강을 중심으로 한 용정, 훈춘, 연길 등에서 벼농사를 지으면서 한인 사회의 기반을 닦았다. 러시아는 변방을 개척한다는 취지 하에 우리 동포들이 연해주로 이주해 오는 것을 허용하고 토지도 제공하는 등 정착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1937년 연해주의 한인들을 강제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하와이로 간 동포들은 주로 사탕수수나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했다. 하와이의 주산업인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재배업자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인 노동자를 흡수했으나 이들이 지나치게 많아지자, 고종에게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을 강력하게 권고하였다. 이때 하와이 이민선을 탄 사람들은 7,262명으로 대부분 20대 독신 남성들이었다. 이들은 사진만을 보고 배우자를 선택해 결혼을 하였는데, 1,000여 명의 조선 여인들이 하와이로 건너가 이민 가정을 형성하였다. 당초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하와이로 이주했지만,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에 67센트라는 적은 하루 급여를 받으며 거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하와이 이주 노동자들이 힘들게 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은 매우 가슴 아파하며 1905년 하와이 이민을 전격적으로 중단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한일합병이 되면서 강제적 이민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하와이에서 정착하게 된다.
이들과 비슷하게 1905년 멕시코로 떠난 1,033명의 조선인 이주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들도 부푼 희망을 안고 조국을 떠났지만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멕시코의 에네켄(henequen : 일명 ‘애니깽’으로 용설란의 일종) 농장으로 팔려갔다. 에네켄은 독성이 강한 가시를 갖고 있는 매우 위험한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에네켄 농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우리의 이민에는 경제적 동기 외에 정치적인 동기가 더해져 많은 사람들이 해외이주를 선택했다. 일제강점이 시작되면서 국권회복운동 또는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이주하는 망명이민이 급증했다. 만주, 러시아, 일본 등지로 대규모 이주를 했으며 전시에는 징용 등의 노무 동원, 학도병, 징병 등의 병력 동원, 여자근로정신대 등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강제적이고 집단적인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다.
초창기 이민의 역사는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광복 전까지는 주로 빈곤과 일제의 억압이 주원인이었으며, 자발적인 것보다는 타의에 의한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광복 이후 해외 이주는 과거와는 달랐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여 명의 여성들이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했고 6.25전쟁 이후에는 전쟁고아들이 입양의 형식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특히, 1954년 시작된 해외입양은 전쟁고아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구호활동 차원에서 시작해 전쟁고아와 혼혈아의 해외입양이 합법화되면서 5,000여 명의 전쟁고아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현대적 의미의 이민은 1962년 3월 9일 「해외이주법」의 공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해외이주법」은 해외이주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1962. 3.9.)로 전문 15조와 부칙으로 되어 있다. 「해외이주법」의 제정 목적은 “국민을 해외에 이주시킴으로써 인구를 조절하여 국민경제의 안정을 기함과 동시에 국위를 해외에 선양함을 목적으로 하여 해외에 이주할 수 있는 자의 자격과 그 허가 기타 해외이주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해서였다. 즉, 잉여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냄으로써 인구 압력을 줄이고 해외에서 일하고 사는 동포들이 송금하는 외화를 벌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률에 따라 브라질 농업 이민이 1962년 이루어졌다. 브라질 농업 이민은 민간과 정부에서 공동으로 추진한 것으로 이주자의 자격조사 실시, 합격자의 외환조치, 이주자 훈련 등을 계획해 그에 따라 이주가 진행되었다. 미국으로의 이주는 1965년 개정된 미국 「이민법」이 많은 작용을 하였다. 이 「이민법」은 「하트-셀러법」(Hart-Seller Act)이라 하는데, 인종을 불문하고 미국 시민권자는 자신의 부모, 자녀, 배우자 등 직계가족은 명수 제한 없이 이민을 받아들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이민법」이 개정된 초창기에는 우리나라에 할당된 2만 명도 채우지 못했으나 10년이 지난 1975년에는 3만 명까지 늘어날 정도로 이민자는 많았다. 이 「이민법」 덕분에 1965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많은 형제, 자매를 미국으로 초청하였다. 1945∼65년까지 미국으로 건너갔던 6,000명 가량의 유학생들이 미국에 정착했는데, 이들이 미국으로의 이민 문호가 활짝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이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민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70∼80년대에는 연 3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맨주먹으로 밑바닥부터 뛰었다. 높은 학력 수준을 갖고 있으면서도 건물청소, 세탁소 등을 운영하며 밤낮없이 열심히 살았다. 미국의 「이민법」 개정을 따라서 캐나다, 호주 등도 「이민법」을 개정하여 비유럽계 이민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이주의 숫자가 줄었다.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재외동포의 전문직, 기술직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오히려 역이민이 증가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해외이주는 계속 감소추세였으나,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정리해고, 명예퇴직 등의 형태로 직장을 잃거나 고용이 불안정하게 되자 보다 안정된 일자리와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하면서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1998년 이후 해외이주에는 미국이 아니라 캐나다가 이주 1순위 국가가 되었다. 캐나다가 자국의 경제발전과 인구성장을 위해 독립, 사업, 투자이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비자발급을 미국보다 자유롭게 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 외에 호주, 뉴질랜드 등도 사정은 비슷해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몰렸다. 그러나 2004년 미국이 다시 해외이주 1순위 국가로 바뀌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종전에는 가족 초청 이주가 주된 형태였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경제의 불안정과 교육 여건에 대한 불만으로 30대 중산층들이 사업 또는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이주를 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전문직, 관리직 등에 종사하면서 중산층을 형성하던 사람들로 해외이주를 선택한 주된 이유는 고용불안정, 지나친 경쟁, 자녀 교육, 사회복지 등 소위 ‘높은 삶의 질’ 추구를 위해서였다.
전 세계 영토 순위 109위인 우리나라 국민은 세계 181개국의 나라에서 뿌리내리며 살고 있다. 우리의 해외이주는 아직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