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2월 5일, 한 신문에 ‘학도호국단 요강’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국가 비상시국 수습대책의 일부로 문교부와 국방부에는 중등학교 생도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학도 호국단을 결성하고자 준비 중에 있는데, 이번에 작성된 학도호국단 조직과 지도 요강을 보면 구성인원은 현재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 학교 전원을 단원으로 하기로 되어 있고, 학원과 향토방위의 성과를 최고도로 추진하기 위하여 이를 학교별로 조직하리라 한다.”
한 때, 학생들이 공부하면서 나라를 지키던 시절이 있었다. 학도호국단의 탄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미군 철수문제와 관련이 깊다. 1945년 광복 이후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전 세계에 공포되자 2년 11개월, 1,071일 동안 남한을 통치했던 미군정의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 미국은 이미 세계전략 차원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해 놓은 터라 이 선언이 번복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우리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가 기정사실로 되자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해 고심한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군의 철수로 인한 전력 공백을 메울 예비 전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48년 9월 15일부터 1949년 6월 29일까지 미군의 철군작업이 이뤄진다. 군정을 위해 남한에 들어왔던 미24군단도 해체되면서 미군 3만 명이 고국으로 돌아가고, 한국에는 국군 훈련을 지원하기 위해 남겨둔 주한미군사고문단(KMAG) 495명만이 남게 된다.
정부는 예비전력 확보를 위해 대한민국 최초의 예비군이자 ‘나라를 수호하는 군대’라는 의미의 호국군(護國軍)을 창설한다. 호국군은 「국군조직법」에 근거를 두고 창설됐다. 당시 「국군조직법」에 따르면 국군은 정규군과 호국군으로 편성돼 있었다. 호국군은 주한미군 철수가 완료된 직후인 1949년 7월에 5개 여단, 10개 연대로 확충됐고, 병력은 2만 명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전국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학도호국단을 결성한다. 1949년 4월 23일 지역별로 조직을 완료한 학도호국단은 서울에서 중앙호국단 결성식을 하고 호국단의 대표가 선서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화랑도의 기백과 숭고한 3.1 정신을 계승발휘하여 반민족적인 행동과 반국가적 상을 철저히 부셔 국토통일과 조국방위에 결사 헌신하겠다”
이후 1949년 9월 28일 대통령령 제186호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이 공포되면서 학도호국단은 공식화된다. 중앙학도호국단의 총재는 대통령이, 단장과 부단장은 문교부 장관과 차관이, 서울시와 각도 단장은 도지사 또는 교육감이, 각 학교 단장은 대학 총장·학장·학교장이 맡았다. 그 결과 1949년 말까지 전국 중학교 이상 학도호국단은 947개에 달했고, 그 수도 45만에 이르렀다.
학도호국단의 활동은 반공·애국 웅변대회, 체육행사와 반공 궐기대회 등이 주였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학도들은 자진해서 학도의용군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당시 서울 시내 각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 200여 명이 ‘비상학도대’를 결성한 것이 출발점이 됐다. 이들은 처음엔 후방에서 피난민 구호와 전쟁의 공포를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며 지역사회의 안전을 도모하는 선무 심리 활동을 담당했지만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학생들은 전쟁터로 직접 뛰어들게 된다.
1950년 7월 1일 대전에서 대한학도의용대가 새로 조직되고, 실전에 참여했다. 당시 학도병은 대략 2만 7,700여 명이었고, 후방지역 또는 수복 지역에서 선무활동에 종사한 학도병은 대략 2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도의용병들은 대구로 내려가 다시 한 번 조직한 다음 우리 군이 낙동강까지 밀리는 위급한 상황 속에 참전해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저지하고 전선의 균형과 안정을 회복하자, 피란처를 찾아 남으로 내려갔던 국민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생업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의 앞날을 짊어질 청년학도들은 시급히 학원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라’는 담화를 발표했고 문교부는 전국에 흩어진 학생들에게 ‘복교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학도의용군은 3월 16일 강원도 홍천에서 무기를 놓고 군복을 벗게 됐다. 하지만 다수의 학도병은 입대를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0년, 학도호국단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게 된다. 2월 28일 대구 경북고, 대구고, 경북여고 학생 1,200여 명이 "학원의 정치 도구화 반대”, “학생의 인권 옹호” 등을 외치며 교문을 나와 도청까지 시위를 벌였다. 사건의 발단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일요일 등교를 요구한 학교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는데, 학교가 학생들의 ‘일요 등교 철회’ 요구를 거부하자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연합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그로부터 약 15일 뒤인 5월 3일 아침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학원의 민주화를 위해 학도호국단의 정식 해체를 의결한다. 이후, 각 학교엔 호국단 대신 학생회라는 자치 조직이 결성된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뒤, 5월의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세상 속에서 사라졌던 학도호국단이란 이름이 1975년에 부활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문교부는 ‘부활’보다는 ‘재건’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설명했다.
“문교당국은 과거의 호국단은 학생단체로서의 성격을 못 벗어났으나 이번 것은 난국에 처한 학원 전체의 대비체제를 갖추는 데 역점이 있으므로 그 근본적인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다시 출범한 학도호국단은 고등학생 이상의 학생들이 모집대상이었으며, 병영 집체훈련과 교련 등 상시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 해 9월 2일, 당시 여의도 5·16 광장(현 여의도광장)에서 전국 1,460개교 146만 학도를 ‘대표’하는 학생 4만1,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중앙학도호국단의 발단식이 열렸다. 이후 학도호국단은 1985년에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