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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더할수록 인기 높아지는 ‘청룡영화상’

국내 대표 영화제는 ‘대종상영화제’와 ‘청룡영화상’이다. 둘 다 반세기의 역사가 흐른 권위 있는 영화제인데, 대종상은 정부 주도로 만들어져 1962년부터 열리고 있는 반면, 청룡영화상은 조선일보가 주최한 민간 영화제로 1963년이 첫 회이다. 1992년부터 대종상도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뀌었으며, 심사 기준도 매스컴과 일반 관객들의 다양한 관점들이 많이 반영되고 있으나, 청룡영화상은 제1회부터 팬들의 참여를 끌어들인 점이 특징이다. 각 부문 심사 전에 전문가들과 네티즌 투표를 통해 수상 후보작(후보자)을 결정하고, 이를 심사할 9인의 심사위원단은 집행위원회의 추천으로 구성하고 있다. 2015년으로 36회째가 된 '청룡영화상'은 공정한 영화상이자 권위 있는 영화상으로 꼽힌다. 청룡영화상이 이 같은 평가를 받게 된 것에는 투명한 심사와 그 과정을 공개하는 것, 그리고 대중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수상자 선정에 있다.

제3회 조선일보 영화제 청룡상 시상식 수상자 썸네일 이미지
제3회 조선일보 영화제 청룡상 시상식
수상자(1965)
제5회 조선일보영화제 청룡상 시상식 썸네일 이미지
제5회 조선일보영화제 청룡상 시상식(1967)
제6회 청룡영화상 수상자 썸네일 이미지
제6회 청룡영화상 수상자(1969)

제1회 청룡영화제 당일 모든 영화촬영을 쉬기로!!

1963년 청룡영화상이 제정된다는 소식에 영화계는 흥분했다. 당시 한국영화협회 이사장이었던 윤봉춘 감독을 비롯해, 유현목 감독, 그리고 영화배우 김승호, 복혜숙, 문정숙, 엄앵란 등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청룡영화상이 한국영화발전의 자극제가 되어주길 바란다'는 글을 투고하기도 했다. 제1회 시상식에 '전 영화인이 참석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영화제작가협회에서는 임시 이사회를 열어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열리는 당일에는 모든 영화촬영을 쉬기로 할 정도였다.

제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1963년 11월 30일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인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이 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팬들의 투표와 엽서로 뽑은 인기상이 관심을 모았는데, 결혼 전의 신성일과 엄앵란이 수상자로 결정돼 시민회관 강당을 가득 메운 3천여 명의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시상 부문은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남녀 주·조연, 각본, 촬영, 음악, 미술, 기술상 등 11개 분야였다. 첫해 최우수작품상은 남녀주연상(김승호·황정순), 각본상(임희재) 등 6개 부문을 차지한 김수용 감독의 「혈맥(血脈)」이 차지했고 감독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이만희 감독이 받았다.

청룡상 출품
청룡상 출품(1967)

1965년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든 「저 하늘에도 슬픔이」

제3회 청룡영화상에서는 김수용 감독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감독상과 작품상을 함께 수상했다. 대구에 사는 11살 소년가장 이윤복 군이 적은 일기가 『저 하늘에도 슬픔이』 라는 책으로 나왔는데, 가출한 엄마를 그리워하며 껌팔이와 동냥으로 동생들과 아버지를 보살피는 내용이었다. 불쌍한 어린 소년의 일기가 화제가 되면서 영화로 만들어지자,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어 당시 극장 입구에선 손수건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1965년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최고 흥행작이었던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필름이 유실되어 그동안 실체를 볼 수 없었는데, 대만에서 영화 필름이 발견돼 2014년 4월 21일 상영회를 갖기도 했다.

월남의 청룡부대에서 ‘청룡트로피’를 보내와

1966년 제4회부터 작품상에는 20만 원의 상금이, 남녀주연상에게는 당시 미국을 도와 베트남전에 참전한 파월부대인 ‘청룡부대’에서 보내온 ‘청룡트로피’가 전달됐다. 공보부 장관 특별상이 신설된 1967년 제5회는 김수용 감독의 「산불」이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제6회는 「카인의 후예」의 유현목 감독이 2회에 이어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이때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이 인기여배우상을 휩쓸어 세 여배우의 ‘트로이카 시대’를 예고했다.

[대한뉴스 제497호] 청룡영화상 시상
[대한뉴스 제497호] 청룡영화상 시상(1964)

17년 만에 부활한 청룡영화상

청룡영화상은 1973년 제10회를 개최한 이후 17년간 중단되었는데, 1973년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스크린쿼터제가 도입되었고, 동시에 한국 영화의 질이 상당 수준 저하되었다는 평가가 직접적인 이유였다. 스크린 쿼터제(screen quota制)는 국내 영화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무역장벽으로 일정 기간 동안 한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의무화한 제도로 1966년부터 실시되었다.

이후 청룡영화상은 1990년 「스포츠조선」의 창간 기념사업으로 부활하게 된다. 부활 첫 해인 1990년 제11회 시상식에는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참석했다. 선정방식은 애독자와 영화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작품상 후보 5편과 감독, 남녀주연상 등 본상 6개 부문의 후보를 뽑았는데, 새로 출발한 청룡영화상에서는 최다관객상과 최우수외국영화상이 추가되었다.

제7회 조선일보 영화제 청룡상 시상식 전경 썸네일 이미지
제7회 조선일보 영화제 청룡상 시상식
전경(1970)
제9회 조선일보 영화제 1972년도 청룡상시상식 전경 썸네일 이미지
제9회 조선일보 영화제 1972년도
청룡상시상식 전경(1972)
제10회 청룡영화상 시상식 썸네일 이미지
제10회 청룡영화상 시상식(1973)

“받을 만한 작품이 받았다”는 공감대가 관건

청룡영화상의 역대 수상 기록을 보면 신인상과 조연상, 주연상 세 부문을 모두 석권한 배우는 장동건과 이정재 뿐이었으며, 여배우 중에는 세 부문의 상을 석권한 배우가 아직 없다. 청룡트로피 최다보유자는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인기스타상을 10번이나 수상한 신성일이며, 고(故) 최진실이 그 뒤를 잇는다. 역대 수상자 가운데 최다 기록(‘16년 기준)은 작품·감독상을 포함하여 모두 5편을 수상한 김수용 감독이 세웠다. 청룡영화상은 흥행에 실패했거나 규모가 작은 독립영화라도 작품성이나 연기력이 좋았던 작품과 배우들에게 수상의 기회를 주고 있다. 영화 관계자들 뿐 아니라 일반 팬들도 수상자들이 호명될 때마다 “받을 만한 배우들이 받았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또한 한 작품에 상을 몰아주기보다 골고루 상을 나눠줘 시상식에 대한 만족감도 크다. 물론 청룡영화상이 36년 동안 늘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해를 거듭할수록 영화를 사랑하는 팬들과 함께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을 키우며 발전해 온 것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http://terms.naver.com)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http://encykorea.aks.ac.kr)
  • 청룡영화상 공식사이트(http://www.blueaward.co.kr/awards)
  • 매일신문, 「대중문화 시상식, 어떻게 만들어지나」, 2015.5.29.
  • 스포츠조선, 「‘응답하라 청룡영화상’ 52년 역사……. 최고 권위 가지기까지」, 2015.11.23.
  • 데일리안, 「대종상 파행의 최대 수혜자 ‘청룡상’」, 2015.11.27.
  • 뉴스엔, 「역시 갓청룡, 또 호평 받은 청룡영화제 시상식계 모범답안」, 201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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