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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시험은 법전과 필기도구 살 돈 그리고 책상 앞에 달라붙어 있을 끈기만 있다면, 출신지역도 학력 제한도 없이 누구에게나 열리는 문이었다. 쉽게 통과할 수 있는 문은 아니지만 그 문을 통과하면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했다. 상류층으로 가는 초고속 열차를 타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가세가 기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한 ‘한방’이었다. 공부 좀 한다는 자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농사일에 허리가 휘어도 부모는 그저 합격만 하라며 자녀 뒷바라지에 매달렸다. 대학을 다니면서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사법· 행정 두 고시를 패스하거나 고시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나라 상위 1%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누구에게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 어귀나 출신 학교 정문에 이름 석 자 쓰여 있는 플랜카드는 기본이었다. ‘누구의 아들, 사법시험 합격’ ‘00중학교 몇 회 졸업생 사법고시 합격’ 등등. 이런 플랜카드가 나부끼는 날에는 동네 회관에서 소나 돼지를 잡는다 하며 온 동네가 잔치였다. 또한, 출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조강지처를 버리거나 고시 공부를 뒷바라지 했던 순정어린 첫 사랑을 버린 이야기는 오랫동안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다.

형제 사법고시 합격 형제 사법고시 합격 형제 사법고시 합격 형제 사법고시 합격 형제 사법고시 합격
[대한뉴스 제872호] 형제 사법고시 합격(1972)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시 합격생이 누리는 혜택이었다. 공부 좀 한다는 소리를 듣고 사법고시를 준비했지만 합격의 영광을 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포기도 할 수 없어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십년 넘게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고시낭인’, ‘고시폐인’들도 많았다.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고시원이나 속세를 버리고 절로 들어가 몇 년 동안 사법고시 합격을 바라고 공부만 한 사람들도 허다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고졸 은행원이 야간 법대에 들어가 사법시험 수석 합격을 했던 이야기, 의붓아버지 밑에 자란 소녀 가장이 수석 합격한 이야기, 노점상 부모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수석 합격한 이야기, 국졸 학력인 사람이 독학으로 7전 8기 끝에 수석 합격한 이야기. 여러 수많은 고시생의 성공신화와 함께 인생 역전의 사다리로 꼽던 사법시험은 2017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사법시험 50여년 역사

사법시험은 변호사, 판사, 검사 등 법조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식과 능력을 정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격시험이다. 조선시대 형률에 밝은 사람을 뽑기 위한 율과가 있기는 했지만 오늘의 사법시험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실질적인 사법시험의 시작은 구한말에 치러진 자격시험과 일제강점기 고등문관 사법과 시험으로 볼 수 있다.

해방이후 일본인 판검사가 일제히 해임되면서 판검사가 턱없이 부족해지자 대법원에서는 1946년 3월에 사법요원양성소를 신설하였고 6개월간의 단기 속성교육을 통해 그 해 7월 사법관시보로 50명을 임명했다가 다음 해 4월에 이들 모두를 판검사로 임명하였다.

1947년에는 일제강점기 때 실시되었던 조선변호사 시험을 부활시켜 그 해 7월 제1회 시험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949년 8월 「고등고시령」이 공포되면서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으로 판검사와 변호사의 자격시험을 대체하게 되어 조선변호사시험은 3회로 폐지되었다. 그 해 12월 첫 번째 치러진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에서는 16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부족한 법조인 배출에 일조한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은 1963년 5월 「사법시험령」이 공포되면서 사법시험으로 대체되었다. 그 해 7월 첫 번째 사법시험에서 총 25명의 합격자를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시험을 통한 법조인 시대가 개막되었다.

사법시험령(안) 사법시험령(안) 사법시험령(안)
사법시험령(안)(1963)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법시험에 도전했는데 전공이나 학력에 대한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법대생뿐만 아니라 비법대생들도 대거 사법시험에 도전하였다. 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사법시험은 고시 낙오생을 만들어 국가적으로 인력을 낭비한다는 지적과 사법시험의 부작용을 막고 다양한 배경의 전문가들을 법조인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이유로 1990년대부터 미국식 로스쿨 도입과 사법제도 개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2007년 「법학전문대학원 설치, 운영에 관한 법률」의 통과로 2009년 전국에 25개의 법학전문대학원이 개원하였다. 사법시험의 폐지를 놓고 사회적 논란이 있었고 헌법소원까지 냈지만 2017년 사법시험 폐지를 규정한 「변호사시험법부칙」이 합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2017년 제59회 사법시험 제2차 시험을 마지막으로 사법시험 제도는 폐지될 예정이다. 이제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법시험이 아니라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야 한다.

  • 제14회 사법과고등고시
  • 제14회 사법과고등고시
    (1962)
  • 사법고시합격증 수여식
  • 사법고시합격증 수여식
    (1977)

사법시험은 1차 객관식, 2차 서술형 주관식, 3차 면접 등 세 번에 걸쳐 치러지며 합격 후 반드시 사법연수원을 수료해야 판사, 검사, 변호사의 자격이 주어진다. 1차 시험에 합격을 하면 그 해와 바로 다음해의 2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1차 시험과목은 법학 분야의 과목과 인접 학문 분야의 과목, 그리고 어학을 포함한다. 2차 시험은 헌법, 행정법, 상법, 민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 7개 과목에 걸쳐 실시한다. 3차 면접은 수험생의 국가관·사명관 등 정신자세, 윤리의식, 전문지식과 응용능력, 의사발표의 정확성과 논리성, 예의 및 성실성 그 밖의 발전가능성에 대해서 평가하는데, 3차 면접까지 가게 되면 거의 합격했다고 봐도 되었다.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3차 면접에서는 거의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런데 제5공화국 때에는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시국관련 시위전력자의 사법시험 면접 불합격 방침에 따라 1981년에 치러진 제23회 사법시험 3차 시험에서 10명이 불합격 처리되고, 이듬해에도 불합격 처리된 일이 있었다.

사법시험 초기에는 선발인원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고 평균 6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67년 사법시험 합격자는 5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법조인력 확대를 위해 「사법시험령」을 전면 개정하면서 1970년부터는 정원제를 채택했으며, 이로 인해 매년 60-80명으로 합격자가 늘어났고 1980년에는 300명에 이르렀다. 1995년 사법개혁의 하나로 선발 인원의 단계적 증원이 결정되면서 사법시험 합격자는 더 늘어나, 1996년 500명의 합격자를 배출한 뒤 2001년부터는 합격자 1천명 시대가 열렸다.

최종합격자 발표는 매년 10월경에 이루어진다. 이날이 되면 가장 술렁이는 곳이 신림동 고시촌이다. 합격이냐 불합격이냐에 따라 희비쌍곡선이 되는 신림동 고시촌은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정보를 찾아 모여들면서 형성되었다. 사실 고시촌이라는 말은 대학가 주변, 하숙집 밀집지역에 고시생들이 증가하면서 고시생 전용 공부방, 고시원들이 밀집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유독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이 유명하다.

신림동 고시촌이 유명해진 것은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1980년대 초부터 관악산 기슭의 여러 하숙집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이 고시생들의 밀집 거주 지역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중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 지역에 대한 명성이 각지로 퍼져 나갔고 점차 타 지역의 고시생들도 모여들었다. 고시생들이 늘면서 이곳에는 족집게 강의, 요점정리 등 시험정보를 알려주는 학원과 고시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90년대 들어 고시 전문학원과 고시 전문서점들이 대학동 주변에 생겨나자 사법시험뿐만 아니라 5급 공무원 공채시험, 공인회계사 등을 준비하는 수험생들도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사법시험제도의 변화에 따라 고시촌도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예정이다. 우리 사회의 숱한 성공신화 중 한 축을 담당했던 사법시험은 2017년 최종 50명의 합격자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집필자 : 황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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