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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빛이 되어준 손길 국립중앙의료원

“제1조 대한민국과 스칸듸나비아 제국과의 중앙의료원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협정에 의거하여 의료사업의 개선발전과 의학수준의 향상을 위하여 보건사회부장관 소속하에 중앙의료원을 둔다.”(「중앙의료원 직제」, 1958.6.27)

지금은 의료 선진국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지만, 1950년대만 해도 그 꿈은 요원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일어난 6.25전쟁에서 한국과 유엔군의 인명 피해만 약 150만 명(한국인 100만 명). 그러나 그들을 수용할 시설과 의료 인력, 의약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쟁 발발 후 스웨덴은 부산에 군 야전병원을, 덴마크는 적십자 병원선을 부산항과 인천항에 파견했다. 노르웨이는 이동외과병원을 미1군단 예하부대에 파견해 의무지원과 민간인 진료를 담당했다. 이들 3국이 진료한 전쟁 부상자들은 민간인을 포함해 대략 21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입원 치료를 필요로 하는 전상자와 피난민 환자들은 여전히 많았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 의료지원단은 귀국길에 올랐다. 1957년까지 남아 임무를 수행하던 스웨덴까지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자, 우리는 이 스칸디나비아 3국에 의료지원 활동을 계속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이 세 나라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과 공동으로 각각 150만 달러의 연간 운영비를 분담하며 서울에 중앙의료원(1960년 국립의료원으로 개칭, 현재는 국립중앙의료원)을 설립하는데 합의했다.

국립중앙의료원의 설립과 운용을 위한 협정체결의 건 참고 이미지
국립중앙의료원의 설립과 운용을 위한 협정체결의 건(1956)
국립의료원 낙성 참고 이미지
국립의료원 낙성(1958)

1958년 12월 30일자 관보에는 ‘중앙의료원의 환자진료 요령’에 관한 보건사회부 공고가 실려 있다. 환자는 국비 환자와 사비 환자로 구분하며, 그 환자 취급 비율은 국비 약 75%와 사비 25%로 했다. 국비 환자는 호별세(살림살이를 하는 집을 표준으로 집집마다 징수하던 지방세) 등급 5등 이하와 천재지변 또는 이에 준하는 돌발 사고를 입은 자, 질환과 병상이 특이한 의학상 영구대상자, 기타 보건사회부장관이나 구호시설의 장이 진료를 의뢰하는 자에 해당한다는 내용이었다.

국립중앙의료원 환자진료 요령 참고 이미지
국립중앙의료원 환자진료 요령(1958)

당시 동양 최고 수준의 장비와 시설로 시작한 중앙의료원은 국비 환자에 대한 진료 비중을 더 많이 둠으로써 영세 서민도 적은 부담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국립의료원의 참된 역할을 해나갔다.

이듬해인 1959년에는 중앙의료원의 의료진 양성을 위해 간호학교가 설립되었다. 입학자격은 고등학교나 사범학교를 졸업한 자와 이에 동등한 학력을 가진 자이며,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간호 전문인력을 양성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이 학교는 1979년 1월 1일 간호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90년대에는 취업난과 맞물리면서 입학 경쟁률이 4대 1을 웃돌 만큼 전문 간호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중앙의료원은 1968년에야 비로소 운영권이 한국 정부로 이양되었다. 신식 설비와 선진 의술로 당시 한국 내 거주 외국인들이 전용치료비 계좌를 만들 정도로 내외국인들 사이에 신뢰가 높았지만, 우리 정부가 운영을 맡게 되면서 의료 서비스의 질이 계속 유지될 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중앙의료원 낙성식 참고 이미지
중앙의료원 낙성식(1958)
이승만 대통령 국립중앙의료원 시찰 참고 이미지
이승만 대통령 국립중앙의료원 시찰
(1958)
국립의료원 연장운영 조인식 참고 이미지
국립의료원 연장운영 조인식
(1964)

“1968년 1월 1일을 기해 우리 정부 측에 정식 인수, 독립채산제로 보사부가 맡아 운영해온 지도 벌써 1년 4개월이 지났다. 지난해 처음 인수할 때만 해도 과연 소기의 성과를 거둘지 의심스러웠던 국립중앙의료원은 68년 한 해 동안 세입목표액 1억 9천만 원보다 6천 5백만 원이나 더 많은 수익을 얻어 개가를 올리고 이제는 명실공히 국내 유일의 종합의료기관으로 자세를 갖추었다.”(「인술(仁術) 탐방 종합병원(綜合病院) 순례」, 매일경제 1969년 5월 20일자 기사)

그렇게 출발은 화려했지만, 곧 만성적자에 시달렸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국립의료원을 공사화 한다, 민영화 한다, 특수병원으로 기능전환 한다는 식의 이론(異論)이 분분하였다. 2002년부터 재정적자에 따른 국립의료원의 특수법인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2009년 3월 2일 국회에서「국립중앙의료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의결되면서 국립의료원은 특수법인으로 전환되었다. 정부는 공시지가 4,000억 원에 달하는 국립중앙의료원 부지의 매각대금을 병원이전 및 신축에 활용해 1,000개의 병상 규모를 가진 현대화된 의료기관으로 신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사랑이 있는 곳에 의술의 사랑이 있다”고 했다. 새로운 터전에서 제2의 역사를 준비하는 국립중앙의료원. 스칸디나비아 3국의 원조와 1958년 설립 당시 가졌던 초심을 잃지 않고, 의료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치료하며 인간의 사랑과 의술의 사랑을 실천하는 의료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

(집필자 : 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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