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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금순이부터 방탄소년단까지   대중가요

2018년 5월 말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인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영어로 번안한 곡이 아닌 우리말로 된 곡으로 POP의 본고장, 미국에서 이룬 쾌거이자, 한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는 3·1만세 운동이 있은 뒤인 1923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한을 담아 외국곡에 우리말 가사를 입혀 만든 <희망가> 혹은 <이 풍진 세월>이라 불리는 곡이었다. 영화 <군함도>의 마지막은 1920년, 그 시대를 대표했던 대중가요였던 이 노래가 장식했다.

역사의 순간을 노래하다

초창기 우리의 대중가요는 일제강점기 역사 속에서 일본 대중가요의 영향을 받아 일본 엔카 풍의 노래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45년 꿈에 그리던 광복이 찾아왔다.

“돌아오네 돌아오네/고국산천 찾아서/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손석룡이 노래한 ‘귀국선’(손노원 작사·이재호 작곡)은 광복의 벅찬 감격을 노래했다. 1948년 장세정의 히트곡 ‘울어라 은방울’(조명암 작사·김해송 작곡)은 ‘자유의 종이 울어 팔일오는 왔건만/ 독립의 종소리는 언제 우느냐’며 정부 수립을 염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터진다. 당시, 전쟁의 참혹함과 실향민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노래한 가요가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주었다. ‘흥남철수작전’의 혼란 속 생이별한 금순이를 찾는 ‘굳세어라 금순아’(1953년, 박시춘 작곡·강사랑 작사)와 피난살이의 슬픔을 담은 ‘이별의 부산정거장’(1954년, 박시춘 작곡·호동아 작사)이 전쟁이 끝난 뒤 하나둘씩 고향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기쁨과 설움을 노래했다.

드라마와 대중가요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드라마를 통해 위로받았다.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멜로 드라마인 조남사 극본, 이상훈 연출의 라디오 주간 연속 드라마 <청실홍실>이 방송되기 시작하면서 주제가 역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이후 드라마에서 주제가는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고 1950~1970년대 한국 영화의 붐이 일면서 <노란샤스 입은 사나이>와 <맨발의 청춘>등 인기 영화주제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수의날 기념식(1967, CET0071187(1-1)) 참고 이미지
가수의날 기념식(1967)

대중 가요사의 시련

정부수립 이후 왜색가요, 남북·월북자의 작품 등을 중심으로 통제되던 대중가요 검열 및 규제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더욱 강화된다. 공보실에서는 국민 정서를 해치는 가요를 바로잡고 건전가요를 보급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음악방송위원회를 구성하고 대중가요 심의제도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대중가요 검열은 광범위하게 진행됐는데, 그 시절 대표적인 금지 가요는 〈동백 아가씨〉였다. 100만 장 넘는 음반 판매량을 올린 이 곡은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금지처분을 당했다. 1967년에는 음반법이 공포되었고 이 법에 따라 108개의 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또한, 공보부는 퇴폐적 노래에서 탈피하여 건전한 대중가요를 정착시키기 위해 '국민 개창 운동'을 시작했다.

대중가요정화에 따른 협조(1974, BA0174121(13-1)) 참고이미지
대중가요정화에 따른 협조(1974)

대한민국 가요심의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시기는 1975년이었다.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정부의 '가요정화대책'에 발맞춰 1차에서 130곡, 2차에서 44곡, 3차에 48곡을 추가하며 불과 3달 사이에 222곡을 금지곡으로 결정한다. 해당 금지가요는 방송은 물론 어떤 형태의 공연이나 음반판매 등이 일절 금지됐다. 거기에 대학생들의 기타까지 압수하면서 수많은 노래에 족쇄를 채웠다. 대표적인 노래로는 김민기의 ‘아침이슬’, 송창식의 ‘고래사냥’, ‘왜 불러’ 등이 있다. 1987년 8월 문화공보부가 가요금지곡 해금지침을 밝힌 이후에도 상당 기간 금지곡으로 묶여 있어야만 했다.

  • 제1회 신작가요 발표의 밤 공연(1961, CET0050250(1-1)) 참고 이미지
  • 제1회 신작가요 발표의 밤 공연(1961)
  • 제1회 전국건전가요경연대회(1971, CET0050018(5-1)) 참고 이미지
  • 제1회 전국건전가요경연대회(1971)
  • 제4회 전국건전가요합창경연대회(1974 CET0046772(24-1)) 참고 이미지
  • 제4회 전국건전가요합창경연대회(1974)

스포츠와 대중가요

198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는 K리그와 KBO 리그, 민속씨름이 시작되는 등 프로 스포츠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대중가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1983년 ‘슈퍼리그’ 출범으로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프로축구 리그를 시작했고 각 팀별 응원가로 대중가요가 쓰이기 시작한다.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여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올림픽 개최의 기쁨을 담은 노래들이 대거 만들어진다. 민해경의 ‘우리들의 올림픽!’(1981), 조용필의 ‘올림픽 향연’(1982), 이정명의 ‘올림픽의 태극기’(1982) 등이 발표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그룹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가 영어, 한국어 버전으로 발표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축구 국가대표팀 응원단 ‘붉은악마’를 중심으로 응원 열기가 전 국민에게 퍼지면서 윤도현 밴드의 ‘오 필승 코리아’, 싸이의 ‘챔피언’, 버즈의 ‘Reds Go Together’ 등 국가대표 팀을 응원하는 가요가 대거 탄생했다.

월드컵 유치 가요 제작·보급(1996, DA0140136(5-1)) 참고이미지
월드컵 유치 가요 제작·보급(1996)

K-pop의 시작

우리 음악은 1977년 이후 일본에서 인기를 끄는 등 새로운 양상을 나타냈다. 가수 이미자, 김연자, 문주란, 남진, 나훈아 등의 음반이 일본에서 높은 음반판매기록을 올렸다. 1982년 일본의 문화방송이 주최하는 아시아뮤직포럼(Asia Music Forum)에 초청됐던 가수 조용필이 최고의 인기가수로 주목을 받은 뒤 그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고, 그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일본 주요 도시 순회공연을 펼쳤다.

1990년대의 가요계는 LP 레코드에서 콤팩트디스크(CD)로 발전하고 뮤직비디오가 본격적으로 제작되면서 가요의 영상화(映像化) 시대에 돌입하게 됐다. 전에 없던 경제 호황을 누리던 시절, 기존의 것과 다른 음악인 랩 열풍을 가져온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해 레게 음악을 알린 가수 김건모 등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주제의 곡들이 소개되며 1990년대 가수들의 음악은 X세대 젊은이들의 생각을 대변했다.

이후, 아이돌 그룹들이 대중가요의 판도를 주도했으며 대중가요의 주류 소비층을 기성세대에서 10대로 끌어내렸다. 한류 드라마의 인기와 모바일 기기가 중심이 되면서 K-pop은 놀라운 발전과 파급력을 가져온다. 2000년대 후반에는 원더걸스를 비롯해 보아, 세븐, 비, 소녀시대 등이 미국 음악 시장에 진출했다. 하지만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그러다가 2012년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HOT 100』 가운데 2위를 차지하고,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2018년 6월 기준 31억 뷰를 달성할 만큼 세계적인 인기를 끌자 우리 대중가요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2018년에는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우리의 대중가요는 이제 우리만의 대중가요가 아니다. 세계와 함께 듣고, 공감하고, 공유하는 세계 가요로 거듭났다. 예부터 ‘흥’이 많았던 우리 민족의 정서가 그대로 담긴 대중가요, 앞으로도 흥할 날만 있길 기대해본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 장유정, 『근대 대중가요의 지속과 변모』, 소명출판, 2012.
  • 장유정, 『근대 대중가요의 매체와 문화』, 소명출판, 2012.
  • 유차영, 『한국 대중가요 100년사』, 대자, 2014.
  • 김혜정, 『대중음악 (대중음악의 장르별 역사와 선곡)』, 일송미디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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