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국가에 머물던 경제는 1945년 광복과 6.25전쟁을 극복하면서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수출지원정책을 추진하여 단기간에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는 경제기적을 이루었다.
전후 복구와 원조에 의존했던 1950년대의 경제상황에서 정부는 관련법을 제정하면서 수출관련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수출장려금을 지원하고 신시장을 개척한 기업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수출을 촉진시키고 고령토, 납석, 형석, 마른 멸치, 건어 등 5개 품목은 수출 결손액을 정부가 보상해주는 등 수출을 장려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 수출품목은 쌀, 생사, 김, 한천, 돈모(豚毛), 면직물 등의 1차 생산품이 70~80%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에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이 추진되면서 수출이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정부는 1962년 12월 ‘수출진흥위원회’를 설치하고 수출정책을 주도하여 합판, 가발, 신발 등 1차 경공업 제품의 수출비중이 20%선에서 80%선으로 향상되었고, 섬유제품은 전체 수출의 40%를 차지하여 주요 수출품목이 되었다. 이밖에도 화장품과 제과류, 맥주, 그릇, 담배, 설탕, 홍삼, 미싱, 농기구 등의 수출이 시작되었고, 1950년대 주요 수출품목이었던 농수산물과 광물 등의 수출은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수출이 활발해지자 1964년에는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였고,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하였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의 호황기를 타고 10년 동안 연평균 41%의 놀라운 수출신장을 기록하며 저개발국가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경공업 위주에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게 되면서 기계, 선박, 철강 등의 중화학 제품들이 수출의 40~50%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공업 제품의 수출은 많은 양을 차지했고 품목도 더욱 다양해졌다. 섬유제품은 1973년 단일품목으로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고, 라디오 등의 전자제품, 라면, 신발, 악기, 고급비누, 보온병, 인형 등이 수출되었다. 또한 자동차와 객차의 수출이 시작되었고, 시멘트의 수출량도 늘어났다. 1970년대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도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1980년대에는 전기, 전자, 자동차, 조선, 기계류의 중화학공업 제품이 수출의 50~60%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전기, 전자 분야의 수출이 급증하며 전체 수출의 30%를 점유하였다. 컬러TV, CDP, 휴대폰, 보일러 등 전자제품의 수출은 1980년대 초반 20억 달러에서 1989년 180억 달러를 달성하였으며, 반도체, 컴퓨터, 가전제품 등이 수출 주력 상품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자동차의 수출 비중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1990년대에는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넘어선 지 31년 만에 1천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자동차, 선박, 화학제품, 전기․전자, 기계류 등의 중화학공업 생산품이 수출 주력상품이었다. 이 중 반도체가 수출품목 1위를 차지하고 1994년에는 단일품목으로는 최초로 수출 1백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선박은 세계 1위의 수주율을 올렸고, CDMA 휴대폰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여 수출시장에서 급부상했다. 수출품목 3위에 이르던 철강제품은 외환위기로 인해 큰 고난을 겪었으나, 위기를 극복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급 등산화와 손톱깎이, 낚시대 등은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의 품목들이다.
2000년대 들어서 고기술 품목들이 새로운 수출품목으로 등장하였다. 세계 최초로 건조된 극지용 드릴십, 인공위성, 새로 개발된 신약 등이 수출되었고, 프리미엄급 전기밥솥과 디스플레이, TV용 LCD, 휴대폰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류가 유행하면서 한국의 가요 등 대중문화가 수출되고 있으며, 연관된 상품의 수출도 늘고 있다.
한편 ‘수출의 날’은 1990년 ‘무역의 날’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후 세계에서 9번째로 무역 규모 1조 달러를 달성한 2011년 12월 5일을 기념하기 위해 12월 5일로 날짜가 변경되었으며, 수출에 큰 성과를 올린 기업을 표창하는 등 수출의 중요성과 의지를 다짐하는 행사가 매년 치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