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 9일 ‘철의 날’ 행사가 열린다. 철의 날은 포항제철소에서 첫 쇳물을 생산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되었다. 포항제철소는 고로에서 철광석과 유연탄을 함께 녹여 쇳물을 만들고, 곧바로 각종 철강제품까지 만들 수 있는 일관제철소다. 포항제철소는 세계적인 철강전문 분석기관 WSD(World Steel Dynamics)의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사’(World-Class Steelmaker Rankings) 순위 발표에서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로 선정됐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기적은 철강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중심에 포항제철소가 있다.
포항제철소의 건설 이전 우리나라는 고철을 녹여 철강제품을 만드는 전기로 업체만 있었다. 6.25전쟁 이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건질 것이라곤 오직 고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53년 세워진 대한중공업공사를 비롯해 이듬해 동국제강과 극동철강(한보철강 전신) 등이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의 철강 산업은 태동기를 맞는다. 이곳에서 만든 철근과 철선, 못, 볼트, 너트가 전후 복구사업에 유용하게 쓰였지만, 실질적인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종합제철소 건설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철강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종합제철 건설계획을 세운 것은 1958년 자유당 정부 시절이었다. 연간 선철 20만 톤 생산을 목표로 여러 차례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 부족, 정국 혼란 등으로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중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기초산업으로 철강 산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경제사정으로 볼 때 국내자금으로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채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제철소 건설을 위해 주식을 공모했지만, 목표액 33억 원의 0.4%인 1,300만 원만 모였을 뿐이었다.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은 다들 무모한 일이라며 반대를 했고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를 두고 과시용 사업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종합제철소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65년이었다. 그 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방문해 제철소 건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더 다지게 되었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의 포이(F. Foy) 회장을 만나 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포이 회장은 국제제철차관단을 만들어 종합제철소 건설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면서 최대한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종합제철소 건설 책임자로 임명했다. 당시 박태준은 만성적자에 허덕이고 있던 대한중석의 사장으로 부임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미국의 협조약속을 받은 우리 정부는 일본의 의사를 타진하는 한편,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도 협조를 구하는 등 차관도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1966년 12월 11일 미국이 주도권을 갖게 된 것에 불만을 가진 일본이 빠진 상태에서 한국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가 정식 발족했다. 여러 차례의 협상과 실사 등을 통해 1967년 7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었고, 그해 9월 박태준이 사장으로 있던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8년 4월 1일 자본금 4억 원(정부 3억 원, 대한중석 1억 원)으로 국영기업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창업 인력 39명과 함께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 3층에서 창업식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KISA에서 선뜻 제철소 건설비를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IBRD의 한국 담당자인 영국인 자페는 포항제철소가 경제성이 없다고 본 것이었다. 결국, 박태준은 1969년 1월 KISA의 모기업인 코퍼스의 포이 회장을 만나 우리나라의 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설명했지만, 차관을 조달하는 데 끝내 실패하였다. KISA의 거절에 낙담한 채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박태준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하여 제철소 건설자금 1억 달러를 마련해야겠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정부는 물론 일본 정·재계를 직접 설득했으며, 결국 포항제철소 건설 계획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고 일본으로부터 차관과 기술을 제공받는 방식으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69년 8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가 종합제철사업 협력원칙에 합의했다. 정부는 이후 1968년부터 1992년까지 현금출자 2,341억 원, 대일청구권 자금 128억 원(5,080만 달러), 현물출자 150억 원, 합계 2,205억 원을 출자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포항제철소 1기 설비공사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박태준 사장은 1968년 6월 제철 건설요원들을 새벽부터 불러 모았다. 직원들 앞에서 “우리 선조들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인 만큼 건설 현장 사무소에서 나와 우향우해 모두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고 외쳤다. 1968년 제철소 건설 부지인 포항만에 자금 100만 원으로 지어졌던 현장사무소의 별칭은 롬멜하우스였다. 당시 제철소 건설 현장은 모래바람이 보안경과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는데 황무지에 모래바람을 맞으며 중장비들과 함께 들어선 현장사무소의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었다. 60평 짜리 2층 목조건물인 롬멜하우스는 낮에는 건설지휘 사령탑이었고 밤에는 숙소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직원들은 밤이면 사무실에서 책상을 침대삼아 모포 몇 장으로 함께 잠을 청했다. 우리나라 철강인들의 땀과 눈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롬멜하우스는 포스코 자산목록 제1호로 지정돼 지금도 포스코 역사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포항제철소의 제1고로에서 1973년 6월 첫 쇳물을 토해냈다. 이어 같은 해 7월 3일 조강연산(가공되지 않고 제조된 그대로의 강철이 한 해 동안 생산된 양) 103만 톤의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었다. 포항제철소는 가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흑자로 전환하였다. 1기를 시작으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던 포항제철소는 1976년 5월 조강연산 260만 톤의 2기 제철소, 1978년 12월 조강연산 550만 톤의 3기 제철소, 1981년 2월 조강연산 850만 톤의 4기 포항제철소를 준공하였다.
포항제철소는 1970년대 국가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철강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제2제철소의 실수요자로 지정받아 전라남도 광양만을 매립하여 광양제철소를 세웠다. 광양제철소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종합제철소이면서 단위제철소 기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와 효율을 자랑한다. 광양제철소의 5개 고로에서는 연간 1,800만 톤의 조강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이 중 제4고로는 개수를 거쳐 2009년 내용적 5,500㎥의 초대형 고로로 재탄생하였다. 또한 2010년 1월 13일 1만 5,613톤의 쇳물을 생산하여 세계 최초로 하루 쇳물 1만 5,000톤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2011년 1월 포항제철소 4고로가 하루 1만 5,901톤의 쇳물을 생산하면서 기록이 바뀌었다. 포항제철소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의 생산조업 기술이며 기록행진은 아직 진행 중이다.
2009년 연간 조강 생산량은 포항제철소 1,434만 4,000톤, 광양제철소가 1,518만 6,000톤으로 총 2,953만 톤을 기록하였다. 이 수치는 당시 유럽 최대의 철강업자인 룩셈부르크의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 중국의 대표철강사인 허베이강철그룹(河北鋼鐵集團)과 상하이바오강(上海寶鋼)그룹에 이어 세계 4위에 해당한다.
2000년 10월 민영화를 완료한 포항제철소는 해외 투자를 확대했으며, 그 결과 철강사업 부분에서 해외 80개사를 거느리는 세계 철강 1위회사가 되었다.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2002년 3월 현재의 상호인 포스코(POSCO)로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