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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에는 오덕(五德)이 있다. 허기를 다스려 주는 덕, 취기가 심하지 않은 덕, 추위를 덜어주는 덕, 일하기 좋게 기운을 돋궈주는 덕, 의사소통을 원활케 하는 덕이다. 막걸리에는 삼반(三反)도 있다. 근로지향의 반유한적(反有閑的)이며 서민지향의 반귀족적이고 평등지향의 반계급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막걸리는 서민의 술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막걸리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막걸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막걸리를 미온주(美溫酒)로 소개한 기록이 있고, 고려 때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왕이나 귀족들은 멥쌀로 만든 청주를 마시는 반면 백성들은 맛이 짙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별·문중별로 다양하게 발전시킨 독특한 막걸리를 빚었다.

막걸리는 쌀이나 밀에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키는데, 술이 완성되면 체에 내려 목으로 넘기기에 거북한 거친 것들만 걸러낸다. 그렇다 보니 곡물로 만들 수 있는 술 중에 가장 원초적인 단계의 술이라 할 수 있다. 막걸리는 다른 술에 비하여 6∼13%로 알코올 도수도 낮은 편이며, 단백질, 유산균 등이 풍부하면서도 열량은 낮은 것이 특징이다. 막걸리 성분 중에 물 다음으로 많은 것은 10% 내외를 차지하는 식이섬유이다.

막걸리를 마시는 참가자 썸네일 이미지
막걸리를 마시는 참가자(1995)
식목일 행사에서 막걸리 시음 썸네일 이미지
식목일 행사에서 막걸리 시음(2000)

가격도 비싸지 않아 서민의 술로 늘 사랑을 받아왔던 막걸리가 한때 오명을 쓴 적이 있다. 막걸리만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6.25전쟁으로 인한 식량부족과 1965년 실시된 「양곡관리법」에 따른 순곡주 제조 금지령으로 쌀 대신 외국에서 수입한 밀가루를 막걸리의 주원료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막걸리는 쌀 막걸리와 비교해 단맛은 덜하고 신맛이 강하여 당연히 술의 질도 떨어졌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1960∼70년대 막걸리는 우리의 주류 시장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는데, 그러다 보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술 제조업자들은 생산원가도 줄이고 발효기간을 앞당기기 위해 공업용 화학물질인 카바이드를 넣어 막걸리를 만들었다. 카바이드가 들어간 막걸리는 불순물도 많았고 맛도 균일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다음 날 숙취와 두통이 뒤따른다는 것이었다. 카바이드 막걸리 때문에 막걸리는 한 때 마시면 뒤끝이 좋지 않은 술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연이은 대풍작과 쌀 수확 4천 만 섬 돌파로 쌀이 남아돌면서 1990년대 초반 다시 쌀 막걸리가 나오게 되는데, 인기는 예전만 못했다. 사람들은 막걸리보다는 독한 소주와 시원한 맥주로 주종을 바꾸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일본인들이 막걸리를 즐겨 마신다는 언론 보도가 있으면서 우리나라에도 다시 막걸리 붐이 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막걸리가 값싼 서민의 술이지만, 일본에서는 한 병에 우리 돈 2만 원 정도인 1,800엔에 판매되고 있는 고급술로 대접받고 있다. 여느 술과 다르게 막걸리는 곡물로만 만드는 술이기 때문에 웰빙 식품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막걸리 열풍은 계속되고 있다. 막걸리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2009년 10대 히트상품’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대한뉴스 제1163호] 쌀막걸리 생산
[대한뉴스 제1163호] 쌀막걸리 생산(1977)

맑고 투명한 서민의 술, 소주의 역사

우리나라의 과일은 당도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과일로 술을 만들기 보다는 대부분 곡물로 만들었다. 곡물을 익혀 누룩과 물을 더하면 곡물의 전분이 당으로 변하고, 이 당을 먹이로 하여 미생물이 증식을 하게 되는데, 이를 알코올 발효라 한다. 이 발효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술이다. 이때 그냥 거르기만 하면 막걸리가 되고 막걸리가 다 된 술에 싸리 등으로 만든 긴 통을 박아 맑은 술을 떠내면 그것이 청주(淸酒)가 된다. 이 청주를 증류하면 소주(燒酒)가 된다. 이 소주는 요즘 흔한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식 소주이다.

주정과 소주의 가격개정
주정과 소주의 가격개정(1953)

소주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올라간다. 고려 충렬왕 때 몽고군을 통해 소주가 들어왔기에 몽고군의 주둔지였던 안동과 개성, 제주도는 소주의 제조법이 유독 발달하였다. 이들 지역에서는 최근까지도 그 전통이 유지되고 있으며, 특히 안동소주가 유명하다. 조선시대 소주의 기록은 다양하다. 『단종실록』에는 문종이 죽은 뒤 상주 노릇을 하던 단종의 몸이 허약해지자 대신들이 소주를 마시게 하여 기운을 차리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중종실록』에는 소주를 마시는 사람이 많아져서 쌀의 소비가 늘고 있으며, 소주로 인한 피해가 크다는 기록도 있다. 1614년 이수광이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저술인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소주는 약으로 쓰기 때문에 많이 마시지 않고 작은 잔에 마셨고, 따라서 작은 잔을 소주잔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내용과 “사대부들이 호사스러워져서 소주를 많이 마셔 취해야만 그만두고 있으며, 이 때문에 갑자기 죽는 사람도 많다”는 기록도 있다. 그만큼 우리 조상들은 소주를 즐겨마셨다.

하지만, 과거의 소주는 요즘처럼 서민의 술이 아니라 왕이나 사대부가 마셨던 술이었다. 점차 일반 서민에게 보급되면서 각 가정에서 소주를 만들어 먹었던 시대도 있었다. 서울지방에서는 대개 5월부터 10월, 남부지방은 여름철에만 마셨으며, 북부지방에서는 4계절 모두 소주가 술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소주는 다른 술에 비하여 비교적 순수하여 오래 저장해도 상할 염려가 없기 때문에 지금도 대중주로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소주는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가 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방법으로 발효시킨 발효주를 시루나 소줏고리를 이용하여 증류한 것이 증류식 소주이다. 안동지방에서 빚어온 전통 술인 안동소주가 대표적인 증류식 소주이다. 희석식 소주는 85∼95%의 도수를 가진 주정에 물, 감미료 등을 넣어서 묽게 희석한 소주를 말한다. 희석식 소주는 1919년 평양에 기계소주공장이 세워지면서 대량생산되었다. 또 이즘에는 재래식 누룩을 이용한 소주가 아닌 흑곡(黑麯)을 이용한 흑곡소주도 나왔다.

그러나 1965년 「양곡관리법」 시행에 따라 우리 고유의 풍미를 가진 증류식 소주가 거의 자취를 감추고 고구마·당밀 등을 원료로 하여 만든 주정을 희석한 희석식 소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주가 대중화되면서 소주 업체 간의 경쟁이 심해지자 1976년 정부는 주류회사의 통폐합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전국에 퍼져 있던 254개의 소주 업체가 정리되었고 지방 소주 업체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각 지방별 제조장 기준으로 「자도주 보호규정」을 신설했다. 수도권의 진로, 부산은 대선, 경남은 무학, 전남은 보해 등 각 도에 한 개씩 총 10개의 희석식 소주 업체가 남았다. 「자도주 보호규정」은 1996년 시장 자유를 침해한다는 위헌 결정이 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소주가 끊임없이 서민의 술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소주의 무한 변신 때문이다. 2000년 후반부터 22%로 알코올 도수를 내려 순한 소주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도수가 낮은 소주가 일반화되었으며, 과일과 접목한 소주로 국민대표 술이라는 자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1837년경에 쓰인 『양주방(釀酒方)』이라는 책에는 “따뜻한 막걸리 한 사발에 소주 한 잔을 부은 다음 소주가 맑게 위로 떠오르면 마셨으니, 이를 혼돈주(混沌酒)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미 조선시대에 요즘과 같은 폭탄주가 있었다는 것이다. 막걸리나 소주가 오래된 서민의 벗이지만, 지나친 음주는 혼돈만 줄 뿐이다.

(집필자 : 황은주)

참고자료

  •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한국식품과학회, 『식품과학기술대사전』, 광일문화사, 2008.
  • 김규회 외, 『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끌리는 책, 2012.
  • 『사물의 민낯』, 애플북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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