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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얼굴 태극기

월드컵 4강 신화 붉은 악마가 만든 대형 태극기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 당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대한민국 축구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강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똘똘 뭉친 선수들의 실력, 그리고 붉은 악마의 뜨거운 응원이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12번째 선수로 칭송받은 ‘붉은 악마’와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응원을 펼친 데에는 응원을 위해 제작한 대형 태극기가 큰 역할을 하였다. 대형 태극기는 월드컵 경기를 통해 “대~한 민 국, 짜자짜 짠짠” 하는 응원구호와 함께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월드컵 직후 붉은 악마 서울시지회는 '월드컵 4강 신화 붉은 악마의 태극기'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대형 태극기의 영구 보관을 위해 박물관은 2년 마다 자연광에 말리고 바람을 쐬어 습기를 말린다. 이것을 ‘포쇄(曝曬)’ 작업이라고 하는데 자연 방식으로 유물을 숨 쉬게 하기 위함이다. 가로 60m, 세로 40m, 무게 약 1톤의 이 대형 태극기는 수장고에서 지상으로 꺼내는 데만 1시간 이상이 소요되고, 한 번에 펼치기에는 공간이 좁아 절반씩 접어 포쇄를 한다. 바람이 잔잔한 날을 정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행한다는 이 포쇄 작업을 앞으로 일반에 공개해도 멋진 장관이 될 것이다.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거나 경례를 할 때면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가슴 울컥한 감동을 느낀다.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부부싸움을 하던 두 사람이 애국가가 울리자 싸움을 멈추고 하강하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는 예를 갖춘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로 시작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시선은 태극기에 꽂혀 있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 장면은 1970년대 실시되었던 국기하강식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제국기에 사용한 태극기 썸네일 이미지
대한제국기에 사용한 태극기(1990)
일제 강점기에 사용한 태극기 썸네일 이미지
일제 강점기에 사용한 태극기(1990)
서울탈환 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군 썸네일 이미지
서울탈환 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군

국기 하강식은 매일 저녁 5시(동절기)와 6시(하절기)에 게양대에서 국기를 내릴 때 하던 일을 멈추고 국기를 향해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예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학생이나 군인은 경례를 하고, 국기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1972년 문교부에서 제작된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89년 국기 하강식이 없어질 때까지 국기 하강식 때면 울려 퍼졌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로 시작하는 이 ‘국기에 대한 맹세’는 2007년 7월 27일에 개정되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내용으로 현재는 공식적인 행사에서만 낭송되고 있다.

태극기사랑운동 추진계획 썸네일 이미지
태극기사랑운동 추진계획(1998)

일본으로 가는 배안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태극기

태극기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 말기 때이다.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는 동안 일본에서는 운양호에 엄연히 일본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공격했느냐며 트집을 잡았다. 하지만 그 당시 조선에서는 국기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을 때였다. 이후 청국 주일공사관의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이라는 책에는 조선이 독립국이라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조선의 국기가 중국의 용기(龍旗)를 본떠서 만들어야 하며 중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을 속국(屬國)처럼 생각하는 중국의 생각에 불만을 품었던 고종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어떠한 것을 국기로 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1882년 8월 9일, 박영효가 이끄는 조선의 사절단은 임오군란으로 일본이 당한 피해를 사과하기 위하여 일본을 찾았다. 이때 박영효 일행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국기가 없는 걸 안타깝게 생각해 배 안에서 당시 조정에서 대체적으로 정해진 국기 도안 내용을 약간 고쳐 국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은 사각 깃발 가운데에 음양을 상징하는 청색과 붉은 색의 태극 원을 그리고 모서리 부분에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4괘를 넣은 국기였다. 그리고 그 기를 일본에 도착했을 때 사용했다. 고종은 다음 해인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태극과 4괘가 그려진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정했다. 그리고 1949년 10월 15일 오늘날의 국기제작법이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올바른 국기게양에 관한 건 썸네일 이미지
올바른 국기게양에 관한 건(1948)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태극기 인수 기념촬영 썸네일 이미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태극기 인수
기념촬영(1981)
대성동 자유의 마을 태극기 게양 썸네일 이미지
대성동 자유의 마을 태극기 게양(1971)
삼일절 행사 태극기 입장 썸네일 이미지
삼일절 행사 태극기 입장(1952)

태극기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도록...

우리 태극기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에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에 건곤감리(乾坤坎離)로 지칭되는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흰색은 백의민족이라고 하는 우리 민족의 밝음과 순수성을 나타낸다.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래 전부터 백색을 숭상해와 백색은 우리 민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태극문양은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며, 우주만물이 상호작용에 의해 생성, 발전하는 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서 음은 파랑으로 양은 빨간색으로 나타낸다.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태극문양을 사용해 왔다는 역사적 흔적을 찾아보면, 신라 진평왕 50년(628년) 때 건립된 감은사(感恩寺)의 석각(石刻) 가운데에 태극도형이 새겨져 있었으며, 고려 인종 22년(1144년) 허재라는 인물이 죽었을 때 그의 석관(石棺) 천판(天板)에도 태극문양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또한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왼쪽 윗부분에 ‘건(乾)’은 하늘을, 오른쪽 아랫부분에 ‘곤(坤)’은 땅을, 오른쪽 윗부분에 ‘감(坎)’은 물을, 왼쪽 아랫부분에 ‘이(離)’는 불을 각각 상징한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고 태극과 4괘를 갖춘 태극기를 생각해보면, 태극기는 영원한 우주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우리 민족의 이상향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극기는 국경일과 현충일, 기념일에 게양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런데 요즘은 규정에 정해진 날에도 태극기를 달지 않는 집들이 많다. 2011년 한국청소년연맹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10명 중 5명(52%)이 ‘태극기를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고 답을 할 정도였다. 태극기는 근현대사의 질곡을 함께 해 온 우리의 얼굴이다. 태극기에 대한 사랑이 우리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