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메뉴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내용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선더버드, 전설의 새가 선택한 우리의 경기장 잠실종합운동장

‘선더버드’.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설에 등장하는 새다. 천둥, 폭풍과 함께 나타난다는 전설의 새는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던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도 나타났다. 일본 나고야와 올림픽 유치 경쟁을 벌였던 우리는 전설의 새, 선더버드와 같은 불굴의 의지로 어떤 위기 속에서도 반드시 올림픽을 유치해서 고국 땅을 밟겠다는 결의를 다졌고, 작전명을 ‘선더버드’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전설의 새는 서울을 향해 높이 날아올랐다.

태생부터 국제규모

88 서울올림픽을 위한 준비는 1976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운동장으로 불렸던 기존의 동대문운동장이 스포츠 수요에 부응하기 어려움을 고려해 이를 대체할 서울 종합운동장 건설계획이 그 해 10월 수립되었다.

잠실 종합운동장 건설 계획 참고 이미지
잠실 종합운동장 건설 계획(1976)

그리고 다음 해 10월 서울시가 88올림픽 개최를 공식화하면서 잠실종합운동장은 국제대회를 위한 운동장의 규모로 1979년 11월 28일 착공을 시작하였다. 올림픽 유치를 위한 주요 계획은 이러했다.

“잠실경기장 안에 수용인원 10만 명의 서울 종합운동장 메인 스타디움을 83년까지 완공하고, 2만 명 수용 규모의 실내체육관을 준공한다. 국제 규모의 실내 풀을 80년에 완공하며, 벨로드롬 및 부대시설을 83년까지 완공한다. 보조경기장은 85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한다.”(「서울시 올림픽 유치 계획 확정」, 경향신문 1979년 10월 8일자 기사)

국제대회를 목표로 지어진 경기장이니만큼 교통대책까지 동시에 진행되었다. 지하철 2호선 중 도심지와 서울종합운동장 간을 1980년 중 연결하고, 2호선의 나머지 구간을 1983년까지 완공한다는 계획이 나왔고, 그와 동시에 김포공항 역시 확장공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잠실종합운동장은 전쟁의 폐허로부터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우리의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기 위한 ‘새로운 얼굴’인 셈이었다.

잠실체육관 참고 이미지
잠실체육관(1980)
서울종합운동장 참고 이미지
서울종합운동장(1986)
잠실주경기장 원경 참고 이미지
잠실주경기장 원경(1988)

완벽, 또 완벽을 위한 노력

1982년 잠실야구장이 일반에게 처음 공개되었다. 개장 기념 우수고교 야구대회가 개최되었는데, 3만 5천 석의 좌석은 새로운 경기장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매진되었다. 사람들은 선수들의 기록과 각종 정보들을 보여주는 큰 전광판(가로 33m, 세로 13.6m)의 위용에 감탄했고, 위․아래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구장의 조형미에 감탄했다. 하지만 출입문의 혼잡도와 경기 기록요원과 보도진들을 위한 공간 배려가 부족하고, 외야 쪽의 경사가 심해 관람석의 사고가 있을 수 있다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이후, 1984년 1월에 이뤄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의 시찰 결과 보고는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정주영 위원장이 “출입문 통과시 10명이 통과한다고 했는데, 8명 이상은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문제를 지적하자 보고를 담당했던 당시 이상연 서울시 부시장은 이에 대해 직접 현장을 보여주며 설명하였다고 한다. “10명씩 분당 800명이 빠져나갈 수 있으며 양 출입문 이용 시 최대한 늦게 달릴 수 있는 시간인 분당 120m 속도로 빠져 나가면 1,800여 명이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은 1분 28초가 소요된다. 통로 통과 시 간격은 육상트랙의 레인(1.22m)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로 10만 명을 수용하는 메인 스타디움이 만들어지는 만큼, 관중 혼잡을 막고 원활한 경기 진행을 위해 세세한 부분까지 심혈을 기울였다.

서울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 잠실종합운동장 시찰결과 보고 참고 이미지
서울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 잠실종합운동장 시찰결과 보고(1984)

1984년, 잠실종합경기장의 공정률은 94%.
한강 변에 위치한 16만 4천 평의 넓은 벌판에 총 공사비 1천 20억 원과 연 동원 인원 1백 20여만 명이 투입되어 만들어낸 꿈의 경기장. 1984년 당시에도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 귀빈들이 모두 이곳을 둘러봤다. 공사현장 방문 인원이 1984년에만 7,000명을 넘어섰다.

대한민국과 함께 울고 웃었던 공간

우리에게 ‘잠실종합운동장’은 어떤 기억일까.
1986년 아시아인의 축제,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영광이 살아 숨 쉬는 곳.
1984년 9월 30일 한일 정기전이 개최된 이후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예선 등 주요 A매치를 개최했던 우리나라 축구의 성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고개를 떨구어야 했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가 당당히 서울올림픽의 성화 봉송자로 등장해 과거의 아픈 기억을 씻어주었던 곳.
약 4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잠실종합운동장.
지금은 막대한 유지비용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며,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한 논의들이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성지이자 해외 스타들의 내한공연이 치러지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며 환호와 환희의 역사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경향신문, 「88년 올림픽 서울 유치 IOC에 공식 요청키로」, 1979.10.8.
  • 김창환, 『체육학대사전-학술용어편』, 민중서관, 2000.
  • 동아일보, 「88이 밝아온다. 서울의 함성을 온 누리에」, 1984.9.29.
  • 동아일보, 「첫선보인 잠실구장 “과연 명물”」, 1982.7.17
  • 동아일보,「세계를 부르는 한국 스포츠의 새 얼굴, 꿈의 궁전 둥실」, 1984.4.3.
  •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 facebook
  • twitter
  • print

주제목록 보기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