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0개 국의 과학기술 역량을 비교한 「2015년 과학기술 혁신역량 평가」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서 우리나라는 스위스, 미국, 일본, 독일에 이에 과학기술경쟁력 5위에 올랐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 기관의 평가여서 후한 점수를 준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평가기관도 우리나라를 과학기술 강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2015년 발표한 우리의 과학 인프라 수준은 세계 5위, 기술 인프라는 13위였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고도화된 과학기술 역량을 보유하게 된 데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역할이 컸다. KIST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산실이자 경제발전과 산업화를 이룬 과학기술의 토대였다.
국내에서 국가연구기관 설립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이었다. 공업을 통한 경제개발이 성공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 우리에게 맞는 기술을 개발해 내고 그것을 산업화하기 위해 연구기관의 설립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했다. 물론 연구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64년 우리나라에는 국·공립연구기관, 대학과 민간기업부설연구기관의 형태로 86개의 연구기관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과 민간 연구소의 연구 활동은 미약했고, 국·공립연구기관 역시 분석실험이나 조사 등 행정지원을 위주로 하는 기술연구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그나마 연구 환경이 좋았던 연구기관은 원자력연구소와 국방과학연구소였는데, 이들 연구소는 공업이나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연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 미국 대통령을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는 우리나라가 베트남에 파병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자리로 마련된 것이었다. 이때 존슨 대통령은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공과대학을 하나 지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공과대학 대신 한국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연구소 설립을 요청한다. 이에 존슨 대통령은 1,000만 달러의 미국 원조를 약속한다. 그리고 1965년 5월 17일 한·미 정상회담 이후 발표된 공동 성명문에는 두 나라가 공동으로 지원해 종합연구기관을 설립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문안은 같이 수행했던 사람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작성되었다. 종합연구기관 설립에 대한 내용이 초안 작성 마지막 순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제대로 된 연구소가 없었던 우리나라에 최초이자 유일한 종합연구기관이 출범하게 되었다.
KIST설립에는 미국 원조 1,000만 달러, 우리 정부에서 1,000만 달러, 총 2,000만 달러가 투입되었다. KIST 설립 당시 80㎏ 쌀 한 가마 값이 3,000원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연구소 설립에 들어간 비용이 막대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으며, 연구소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먹고 살기 힘든데 과학기술이 무슨 소용이냐며 반대 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연구소 설립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1966년 2월 10일 최형섭 박사를 초대 소장으로 하는 KIST가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자체 건물이 없어서 서울 청계천 6가 한일은행 지점과 종로 YMCA 건물 5층 등을 전전해야 했다. KIST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던 박정희 대통령은 매달 두 차례씩 이 건물들을 찾아 연구원들을 격려하고 연구 과정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본격적 연구 활동은 1969년 서울 성북구 화랑로에 연구소 건물이 지어지면서 시작됐다. KIST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구를 담당할 연구인력이었다. 최형섭 소장은 유능하고 경험 있는 연구원들을 모으기 위해 해외에 있는 한인 과학기술자들을 찾아다녔다. 이들 대부분은 휴전 이후 1950년대 유학을 간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다시 고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KIST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연구의 자율성과 생활의 안정성을 약속했다. 구체적으로 원내 아파트를 제공하고, 당시 국내에는 없던 의료보험도 미국과 계약을 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임금은 국내 대학교수의 2∼3배 수준으로 책정했다. 이렇게 해서 첫 해 실장급 과학자 18명을 유치할 수 있었다. KIST로 오기로 한 연구원들은 일간지에 일일이 소개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높았다. 당시 연구원증을 가지고 있으면 교통법규에 걸렸어도 교통경찰들이 은근히 봐줄 정도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연구원에 대한 남다른 대우와 최고의 연구 환경, 연구원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되자 KIST 연구원들은 강한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고 연구에만 매진했다. 당시 전기를 아끼기 위해 밤이면 의무적으로 소등을 해야 했는데도 KIST는 예외여서 연구소의 불은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았다.
KIST의 설립 목적은 순수 학문연구는 아니었다. 애초 연구소의 필요성도 낚시를 하는 기술을 가르치겠다는 의도에서 시작한 것인 만큼 학문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산업발전, 특히 공업화와 관련한 기술을 연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에 KIST는 남다른 방법을 취했다. 그것은 연구를 한 뒤 사용자를 찾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연구과제가 무엇인지를 물색하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연구를 하는 방식이었다. KIST 연구원들은 영업부 사원처럼 연구소를 소개하는 슬라이드와 책자를 만들어 연구 프로젝트를 팔러 다녔다. 물론 이 방법이 순탄하게 굴러갔던 것은 아니다. 기업가들은 일본에서 기능공 몇 사람을 데려오면 되지 무슨 연구를 하느냐며 질책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KIST의 연구는 계속되었고 눈으로 보여지는 직접적인 성과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실례로 1968년 폴리에스테르 방사회사인 삼덕물산이 고가를 들여 설치한 장치에 문제가 생겼다. 장치를 공급한 외국 회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비용과 기간을 요구했다. 삼덕물산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KIST에 연구를 의뢰했고 KIST는 방직연구실, 기계연구실, 전자연구실 연구원들이 팀을 짜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기능을 정상화시켰다. 고가의 장비 때문에 곤란을 겪던 삼덕물산이 기사회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성과를 거두면서 설립 초기 연평균 70여 건이던 연구용역 건수는 1970년대 전반 188건, 후반에는 210여 건으로 3배로 늘었다.
KIST는 국내 과학기술의 선구자로 폴리에스터 필름, 컬러 TV와 개인용 컴퓨터의 개발 등 선진 산업기술을 추격해 산업기반을 만들었다. 특히, 철강 산업, 중화학공업, 전자산업, 조선산업, 자동차공업 등 우리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 산업 기술의 기본계획을 수립한 것도 KIST였다. 1969년 포스코 설립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고 필요한 기술계획서를 작성해 포스코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대형 조선소 건립의 필요성을 주장해 현대조선을 만드는 데에도 기여했다. 또한, KIST 전산개발센터는 국내에 컴퓨터를 처음 도입해 대입예비고사 자동채점에서부터 전화요금관리업무 자동화, 정부 예산업무 전산화까지 여러 분야에서 생산성 혁명을 이끌었다.
KIST의 과학기술 수준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였다. KIST 산하의 도핑컨트롤센터가 서울올림픽 때 캐나다 육상선수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실을 밝혀내었고, 올림픽경기 종합전산시스템을 구축하여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설립 초기 KIST는 선진기술을 모방하거나 추격 연구를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2000년대 들어와서는 의료복지기술, 정밀소재 공정기술, 정보산업용 신기능 소자, 3차원 영상매체기술, 휴먼 로봇 시스템 등 미래지향적인 5대 과제를 중심으로 수행하고 있다. 주요 연구 성과로 비디오테이프용 폴리에스터 필름, 고분자형 3세대 항생제, 공업용 인조다이아몬드, 광섬유, 고성능 리튬폴리머전지, 신약물 전달체제, 휴먼 로봇시스템 개발 등이 있다. 미국 타임지가 뽑은 세계 50대 발명품에 KIST의 영어교사 로봇이 선정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세계적 저널에 지속적으로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KIST 연구 성과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2014년 발표된 기술경영경제학회 보고서에 따르면, 1966년에서 2012년까지 KIST가 창출한 사회경제적 파급효과는 595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초기 투자비용을 비교해 봤을 때, 이 숫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이득을 남긴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룬 경제발전과 산업화의 과학기술은 바로 KIST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