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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기적소리에서 KTX까지... 철도

한국 철도의 출발은 멀리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9월 18일에 인천(제물포)에서 노량진 사이의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서울과 인천 사이를 완전히 연결하지 못하고 한강 이남의 노량진까지만 철길로 연결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00년 7월 5일에 한강철교가 준공되고 그 해 11월 12일에 드디어 완전 개통해 서울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된 그 1899년 5월에는 서울 서대문에서 청량리 간 전차궤도를 완공, 시운전을 거쳐 처음으로 서울 시내를 전차가 달리기도 했다. 철길에 의한 궤도교통의 혁명이 시작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일본이 관련되어 있거나 일본이 한반도에서 이득을 남길 속셈으로 벌인 사업이었다. 특히 철도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고 한반도의 물산들을 수탈해가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먹고 살기 힘들어 고향을 떠나 북간도 등지로 이주해가는 사람들이 뿌린 눈물의 철길이기도 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목 메인 기적소리와 함께 밤새도록 어둠 속을 씩씩거리며 달리던 열차였다. 객차 안에서는 이따금씩 쫒기는 변장한 독립투사와 뒤 쫒는 일본형사들의 추격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지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한국철도의 역사는 출발부터 숱한 애환과 이별과 만남, 누군가, 무언가를 피해서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1905년 5월에 경부선이 개통되고, 이어서 임진강 철교, 대동강 철교, 낙동강 철교가 속속 준공되면서 1906년에는 서울에서 신의주 간의 경의선도 개통되었다. 그리고 1914년에 호남선과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비로소 한반도 전역으로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1928년에 함경선, 1937년에 혜산선, 1939년에 만포선, 1942년에 중앙선이 속속 개통됐다. 당시로서는 멀리 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일제는 이 철도를 이용해 온갖 것을 실어 날랐다. 목재, 광물, 놋그릇과 옷감, 식량이 될 만한 농수산물, 집집마다의 고물과 수저, 심지어는 군대위안부에 징용과 징병 등 사람까지 철도로 실어 날랐다.

영암선 개통 썸네일 이미지
영암선 개통(1955)

광복이 되어 미 군정청이 38선 이남의 철도행정을 담당하다가 6.25전쟁 때는 전시수송체제로 1955년까지 그 운영권이 유엔군 산하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때 200여 만 명 이상의 피란민들을 실어 나르느라 철도는 또 한 번 홍역을 치렀다. 달리는 기차 지붕에 매달리기도 하고, 한강다리 폭파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렇게 달리던 기차는 38선 부근에서 빗발치는 총탄을 맞고 ‘철마는 달리고 싶다’며 지금도 비무장지대 풀숲에 누운 채 녹슬어 가고 있다. 남북 간의 철도는 그때 끊겼다. 광복 당시 철도의 총 길이는 6,362km로 이 가운데 약 3분의 2가 38선 이북에 있었다. 전쟁 통에도 철도는 많은 물자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피란살이 설움을 겪고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노래 ‘이별의 부산정거장’도 그때 나왔다. 그 후로도 한동안 한국의 철도는 사람들의 가슴에 이별의 슬픔과 애환으로 남았다.

충북선 개통 썸네일 이미지
충북선 개통(1959)

전쟁이 끝나고 그 다음의 철도는 새 삶을 찾아서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하는 이농민(離農民)들의 철길이었다. 그러던 한국의 철도가 비로소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대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디젤기관차를 도입해 운용을 개시한 것이 1964년이었다. 이때부터 기차는 기적소리마저 달라졌다. 그때의 3등 칸 좌석은 선착순으로 달려가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였다. 야간 준급행이라는 열차를 타고 밤새도록 달려 종착역에 도착하면 얼굴과 콧구멍이 시커멓게 되기도 했다. 주로 이 시절에 나온 노래들이 ‘대전브루스’ ‘비 내리는 호남선’, ‘무정열차’, ‘울리는 경부선’ 등으로 철도에 대한 당시의 정서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떠나보내는 아픔과 이별과 만남, 삶의 희망을 찾아 떠나는 애환과 그리움을 철길에 마구 뿌리기를 얼마였던가.

그러다가 철도가 대량수송의 시대, 산업화의 대동맥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였다. 1970년대 철도의 여객수송은 25% 대를 유지했고 화물수송의 52%를 철도가 분담했다. 철도는 진화했고 대망의 특급열차도 등장했다. 1960년대 초 ‘재건호’에 이어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가 차례차례로 철길을 달렸다. 속도를 높이고 주행시간도 단축하기 시작했다. 철도수송의 속도경쟁에 불이 붙기 시작했고, 더 이상 이별과 눈물로 얼룩진 예전의 철도로 머물 수가 없었다.

1972년에 전기기관차가 도입되었고, 1974년에는 수도권 전철 개통, 서울시내 지하철도 그때 나왔다. 1980년대에 접어들자마자 고속철도에 대한 논의가 정부에서 있었고, 그 결과 1989년 고속전철 건설계획이 수립되었다. 곧 이어 1990년 경부고속전철 건설계획이 발표되고, 1992년 6월 30일 ‘천안아산역’ 예정지에서 드디어 경부고속철도 기공식을 갖고 착공에 들어갔다. 지하철과 고속철도, 드디어 한국의 철도도 21세기 수송혁명의 상징인 고속철도시대에 접어든 것이었고, 또 하나의 거대한 국책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중간에 외환위기도 맞고 설계도 변경되고, 부실공사 논란까지 겹쳐 처음 예정했던 공사기간 6년을 훨씬 넘겼다.

고속전철 및 신국제공항 건설계획 썸네일 이미지
고속전철 및 신국제공항 건설계획(1989)
경부고속철도 건설 썸네일 이미지
경부고속철도 건설(1994)

무려 12년의 공사 끝에 2004년 4월 1일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 공사기간이 늘어난 만큼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우리도 서울서 부산까지 반나절이면 다녀오는 고속철도를 갖게 되었다. 21세기 철도의 르네상스를 맞이한 것이다. 2015년 4월 2일에는 충북 오송에서 광주 송정역까지 달리는 호남선 고속철도도 완전 개통되었다. 경부선과 호남선 두 축을 고속철도로 완성하는 순간이었다. 처음 프랑스에서 들여온 KTX-1 고속열차에 이어 대한민국의 독자기술로 개발된 완전 국산고속열차 ‘KTX-산천’이 2010년 3월부터 달리기 시작했고, 다시 호남선에는 KTX-3라고 할 수 있는 역시 국산 ‘KTX-달리안’ 고속열차가 투입되었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브리태니커, 한국브리태니커회사.
  • 전완길 외(공저), 『한국생활문화 100년』, 도서출판 장원, 1995.
  • 철도청, 『한국철도 100년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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