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는 축구의 사전적 의미는 “주로 발로 공을 차서 상대편의 골에 공을 많이 넣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로 11명이 팀을 이루며, 골키퍼 이외에는 손을 쓰면 안 되고 주로 머리와 발을 사용한다”이다. 이런 사전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축구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구기종목이다.
근대 개념의 축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00여 년이 넘었다. 그동안 축구는 우리 민족의 울분과 눈물, 감격과 환희를 함께했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축구를 통해 민족의 울분을 달랠 수 있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아픈 역사를 함께 했던 서민들의 희망이었다. 방송을 통해 시시각각 전해오는 태극전사들의 활약에 온 국민이 웃고 또 울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축구를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로 뭉칠 수 있다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축구의 종주국이라 불리는 영국만큼이나 우리 축구의 역사도 오래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축국(蹴鞠)’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은 축국을 좋아해 궁궐 뜰에서 누이의 아들과 공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함께 축국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농주(弄珠, 둥근 놀이기구)를 가지고 놀다가 김춘추의 옷고름이 찢어졌는데, 이를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꿰매주었고 이 일 때문에 문희는 훗날 김춘추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발로 하는 공놀이는 계속되는데 발해, 고려, 조선 모두 각종 기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때의 축구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축구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1882년이다. 제물포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Flying Fish)호의 승무원들이 인천항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부두에서 축구 시합을 벌였으며, 이날 축구 경기에 사용했던 공을 우리나라 어린이에게 주고 갔다. 이 공이 한국에 전해진 최초의 축구공이다. 정식 축구의 보급은 1904년 서울의 관립 외국어학교에서 축구가 체육 과목의 하나로 채택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축구는 급속하게 퍼져나갔으며,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 아래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시작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1921년 제1회 전 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1928년 5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조직인 조선심판협회가 창립되었다. 1933년 9월 19일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됨으로써 우리나라 축구가 조직화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축구는 일제 식민지 아래 가슴에 쌓인 민족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청량제였고, 독립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싹이었다. 조선축구협회는 광복과 함께 1948년 9월 4일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으며 같은 해 국제축구연맹(FIFA : Fede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에 가입했고, 1954년에는 아시아 축구연맹(AFC : Asian Football Confederation)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 때부터 세계무대로 발을 내딛은 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 최초로 진출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월드컵 본선에 오른 국가로 총 10차례 진출했고, 그 중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2014년 브라질 월드컵까지 8차례 연속 출전을 기록 중이다.
한편 1983년 아시아 최초로 프로리그가 시작되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후 우리 축구가 새로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고, 그 바람을 담아 프로축구가 출범하였다. 할렐루야, 유공, 포철 등 3개 프로팀과 프로팀을 창단시킬 계획이었던 대우와 국민은행이 참가했다. 각 팀들은 지역 연고지 제도를 실시해 경기·강원·충남·북은 할렐루야, 서울은 유공, 경북·대구는 포철, 부산·경남은 대우, 전남·북은 국민은행이었다. 프로 축구의 부흥을 위해 슈퍼리그의 모든 경기가 TV로 중계됐으며, 첫 출발은 성공적이었다. 2015년을 기준으로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주관하는 프로축구 리그에는 1부 K리그 클래식 12개 팀, 2부 K리그 챌린지 11개 팀이 있다.
이렇듯 1980년대 이후 급속히 발전한 우리나라의 축구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일본과 더불어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공동으로 개최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대회의 공식명칭은 'FIFA 월드컵 2002 KOREA-JAPAN'이었고 개회식은 우리나라, 결승전은 일본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피버노바로 불리는 월드컵 공인구가 처음 사용되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우리나라팀은 이 대회에 출전, 폴란드를 상대로 48년 만에 첫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꺾고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가까우면서 먼 나라 일본, 일본과의 축구 대결은 우리 국민들을 늘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아시아 지역을 총괄하는 아시아축구연맹과 동아시아축구연맹에 속해 있기 때문에 FIFA 월드컵과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축구 역사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한·일전의 면면은 이러하다. 1926년 10월 16일 초창기 최강의 클럽팀이었던 조선축구단은 일본 원정 축구를 위해 도쿄에 도착했다. 이들의 상대는 일본 최강팀 리조(鯉城) 구락부 팀이었다. 첫 날의 시합을 시작으로 총 8번의 경기에서 조선축구단은 5승 3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했다. 당시 한글 신문은 이 시합을 “일본인 선수들은 도저히 추종하지 못하는 조선군 득의의 롱슛과 교묘한 패스로 2점을 넣어 결국 2대 0으로 조선군이 쾌승하였다”고 보도했다. 일본 현지에서 핍박을 받고 있던 우리 동포들은 ‘조선축구단’의 선전소식에 잠시나마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랠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치룬 첫 국제경기는 1954년 3월 7일 일본 도쿄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에서 열린 195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1차전이었다. 원래 이 예선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Home and away, 자기의 홈그라운드에서 상대를 맞아 경기한 다음, 같은 상대의 홈그라운드에 가서 그 상대와 경기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어야 하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대표팀의 입국을 거부해 두 경기 모두 도쿄에서 열렸다. 광복 후 최초로 벌어지는 한·일 간 축구 대결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당시 대표팀을 맡았던 이유형 감독은 “만약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선수단 모두가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이런 각오 덕분인지 일본이 홈 개최라는 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1차전에서 1-5라는 큰 점수 차로 승리했다. 2차전은 2-2 무승부로, 총 점수 7-3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대표로 스위스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했다.
1960년 11월 6일 효창운동장에서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일본 대표팀이 1962년 칠레 월드컵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을 위해 경기를 갖게 되었다. 경기가 성사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경기장에서 일본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가 문제였는데, 이를 위해 국무회의까지 열리게 되었다. 국무회의에서 대전국의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FIFA 월드컵 규정을 존중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개회식을 무사히 치르게 되었다. 효창운동장에는 원래 수용인원보다 5천 여 명이 더 넘은 2만 5천 여 관중이 들어찼다. 경기가 시작되고 문정식 선수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우리 선수들은 수적 열세를 안고 경기를 하게 되었다. 첫 골은 일본이었지만, 곧 동점골을 만들어내었다. 효창운동장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고 장면 총리는 관중들의 흥분을 우려해 경기를 중단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감독은 ‘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총리와 측근을 설득해 경기는 계속되었다. 결국, 우리나라는 후반전에 결승골을 터트려 2대 1로 승리했으며 2차전도 승리하여 유고와 최종 예선전을 치룰 수 있었다.
1985년 멕시코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의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다. 1차전은 10월 26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2차전은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렸다. 두 경기 모두 우리의 승리였다. 2차전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모두가 부둥켜 안고 32년 만에 월드컵 진출의 기쁨을 만끽했다.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세 번째 상대 또한 일본이었다. 1997년 9월 28일 도쿄국립경기장에는 5만 여 관중이 운집했다. 양 팀 모두 조 1위에게 주어지는 본선 직행 티켓을 거머쥐기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했다. 경기는 팽팽했다. 후반전 중반에 일본 선수가 선취골을 넣었다. 하지만, 후반 말미에 서정원, 이민성 선수가 골을 넣음으로써 우리가 승리하며 조 1위로 프랑스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2015년 8월 5일까지 우리나라와 일본은 총 77경기를 하였으며, 전적은 대한민국이 40승, 일본이 14승, 무승부 23경기로 우리나라가 크게 앞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