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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앵란과 신성일의 ‘세기의 결혼식’

1964년 ‘세기의 결혼식’으로 불리며 세간의 화제를 모은 당시 최고 영화배우 엄앵란과 신성일의 결혼식은 지금도 회자되는 요란스런 행사였다. 지금의 쉐라톤그랜드워커힐에서 열린 이들의 결혼식에는 4,000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고, 식장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청첩장이 암거래되기도 했다. 전례를 볼 수 없는 호화결혼식이었다.

1960년대 말 조금씩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화가 되어 가면서 소비적이고 화려한 가정의례가 늘어났다. 1969년 1월 16일 정부는 이러한 허례허식을 없애고 의식 절차를 합리화함으로써 낭비를 억제하고 사회기풍을 진작하기 위해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였고, 동법 시행령에 ‘가정의례준칙’을 넣었다.

“전통이나 전래의 방법이란 마땅히 길이 보전되고 전승되어야 할 문화적 유산이기도 하나, 그것은 그 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결코 형식적인 절차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의 관혼상제만 하더라도 이를 존중하는 그 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음복이나 다과가 많고 적고 하는 절차나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가정의례준칙 공포에 즈음하여」라는 담화문의 일부로 가정의례준칙이 왜 필요한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취지를 담은 ‘가정의례준칙’은 1973년 대통령령으로 확정, 공포하였다.

가정의례준칙 선포식 썸네일 이미지
가정의례준칙 선포식(1969)
가정의례준칙 계몽강연회 썸네일 이미지
가정의례준칙 계몽강연회(1969)
가정의례준칙 실천공로자 표창 썸네일 이미지
가정의례준칙 실천공로자 표창(1970)

가정의례란 개인의 일생에서 경험되는 중요한 사건과 관련하여 가족을 중심으로 행하는 일련의 의례들을 말하며, 거기에는 혼례·상례·제례·회갑연 등이 포함된다. 쉽게 말해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행사들인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의례의 간소화를 강권하는 것은 일종의 ‘사치금지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69년에 최초로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에는 약혼식 폐지, 혼인 당일 혼인신고, 장례는 5일 이내, 노제 폐지, 부고와 축문은 한글 전용으로 할 것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기존의 의례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이었다. 1973년에 개정된 ‘가정의례준칙’에는 기존 혼례, 상례, 제례만 인정했던 의례의 범위를 회갑연까지로 넓혔다. 더불어 장례는 3일장으로, 청첩장 발송 금지, 함잡이 금지, 단체명의의 신문 부고 금지 등의 규정과 양식을 내놓았다. ① 청첩장 등 인쇄물에 의한 하객초청, ② 기관·기업체·단체 또는 직장명의의 신문부고, ③ 화환·화분 기타 그와 유사한 장식물의 진열·사용 또는 명의를 표시한 증여, ④ 답례품의 증여, ⑤ 굴건(屈巾:주가 두건 위에 쓰는 건)제복의 착용, ⑥ 만장의 사용, ⑦ 경조기간 중 주류 및 음식물의 접대 등 금지 내용을 조목조목 포함시킨 것이다.

가정의례준칙 회의 썸네일 이미지
가정의례준칙 회의(1971)
가정의례준칙에 의한 55쌍 합동결혼식 썸네일 이미지
가정의례준칙에 의한 55쌍 합동결혼식(1974)
가정의례준칙에 의한 55쌍 합동결혼식 썸네일 이미지
가정의례준칙에 의한 55쌍 합동결혼식(1974)

잘 지켜지지 않는 준칙

그런데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마련한 이러한 준칙에 대한 시각이 다양했다는 것이다. 전근대적인 전통가정의례를 현대식으로 표준화하여 범국민적인 생활규범을 마련했다는 것을 좋게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너무 구체적으로 국민들의 생활을 정부에서 간섭하고 있으며, 이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이 때문인지 초창기 가정의례준칙에 대한 준수율은 매우 낮았다. 더군다나 강제력도 없이 계몽과 권고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공무원들만이라도 가정의례준칙을 지키도록 강제 규정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정부는 강력한 단속의지를 천명하면서 1973년에 개정안을 발표할 때 처벌조항도 함께 내놓았다. 이때 발표된 개정안에는 청첩장이나 부고장을 돌리거나 장식물의 진열 및 사용, 답례품의 증여, 굴건, 만장 사용, 주류 및 음식물 접대 등의 행위를 하면 5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새로운 가정의례] 1973년 개정된 새로운 가정의례법의 내용과 준칙 썸네일 이미지
1973년 개정된 새로운 가정의례법의 내용과 준칙(1969)

“호화, 사치, 과소비 억제풍조에도 불구, 아직도 일부 계층은 관혼상제에서 정부시책에 역행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혼례의 경우 가정의례준칙 상 금지돼 있는 청첩장 고지가 1백27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나머지는 음식물 접대 7건, 답례품 증여 4건, 기준 이상의 화환 및 화분 진열 3건 등이었다.” 이는 1992년 6월 11일자 ‘가정의례준칙 위반 사례 늘어’라는 제목의 연합뉴스 기사로, 법 시행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가정의례준칙’은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예로부터 가정의례를 중히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혼례와 상례를 비롯한 각종 의례를 행해왔으며 고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가정의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조상의 제사를 일반 서민은 부모에 한해서 모시도록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와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를 일반적으로 행한 것도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의례절차를 둘러싼 논쟁이 훗날 당쟁의 명분이 되기까지 했으니 우리가 얼마만큼 의례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일부 지역에서 절차가 약간 간소화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먹고 사는 문제에 치중하다 보니 유교적 가정의례가 다소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다시 가정의례에 있어 허례허식이 행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건전가정의례준칙안 썸네일 이미지
건전가정의례준칙안(1999)

이 법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 기존의 '가정의례준칙'은 1999년에 폐지되었다. 대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풍속을 감안, 기준을 대폭 완화하고 절차를 대폭 간소화시킨 '건전가정의례준칙'이 새로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건전가정의례준칙’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도, 그 내용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준칙이 일반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는데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하고 심사숙고해서 준칙을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현실과 거리가 있고 인정을 무시한 준칙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법령은 제정하고 공포하기는 쉬운 일이나 제정된 법령이 국민에 의해서 외면당하거나 지켜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제정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특히 이 가정의례준칙은 집집마다 개인마다 사는 정도가 다르고,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사는지가 다르기 때문에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더욱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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