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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렬하게, 마음을 움직이다 표어

새 학기가 되면 새로운 학용품, 새로운 친구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정한 목표에 어울릴만한 새로운 명언 하나씩을 적어 책상 앞에 붙여두는 학생들이 지금도 많을 것이다. 사람은 하루에도 수백 마디의 잡담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한마디의 말에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삶의 방향을 잡기도 한다.

1992년 한 신문에 특별한 전문가 최림길과의 인터뷰가 실렸다. 30년 동안 표어를 연구한 표어전문가인 그는 당시 수집한 표어의 수만 해도 ‘4천여 점’, 그가 지은 표어 역시 4천여 편에 달한다고 했다. 그가 꼽은 표어의 매력은 ‘촌철살인’이었다. 짧은 문장 안에 명확하고 정확한 뜻을 함축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표어의 가장 큰 특징이지만, 그것이 표어를 만드는 사람이 가장 힘들다고 느끼는 점이라고 밝혔다.

법무부 인권옹호 주간 표어 참고 이미지
법무부 인권옹호 주간 표어(1955)
10월 유신 표어 아치 참고 이미지
10월 유신 표어 아치(1972)
쥐잡기운동 관련 표어가 적힌 조형물 참고 이미지
쥐잡기운동 관련 표어가 적힌 조형물
(1972)

‘한번 뭉쳐 민국수립, 다시 뭉쳐 실지회복’, ‘대한민국 주권하에 남북을 통일하자’ 는 표어는 정부수립 이후 시대적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59년 취학률은 전국 학령 아동의 95.3%에 달했지만, 성인의 문맹률은 심각했다. 광복 무렵 2,000만 국민 중 80%에 가까운 1,600만 명이 문맹이었다. 간략한 문장으로 함축해서 표현하는 표어는 글을 읽기 힘든 사람들도 쉽게 기억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에 그림 설명까지 함께한 포스터가 동네 곳곳에 붙으면서 표어는 대한민국 근대화 과정에서 진행된 국토재건 운동, 쥐잡기 운동, 식량 증대를 위한 퇴비증산 운동, 질병퇴치 운동 등 각종 정부시책을 효율적으로 국민에게 전달할 수 있는 도구였다.

표어-익혀서 먹고 끓여서 마십시다. 참고 이미지
표어-익혀서 먹고 끓여서 마십시다.(1963)
6.25사변 제11주년 기념 여자배우들 검소한 복장으로 새살림 이룩하기 시가행진 참고 이미지
6.25사변 제11주년 기념 여자배우들 검소한 복장으로 새살림
이룩하기 시가행진(1961)

1960년대 시행된 근검절약을 유도하고 사치 풍조를 배척하기 위한 ‘의복간소화 운동’ 역시 ‘사치한 옷차림에 집안 살림 무너진다’, ‘너도나도 검소한 옷, 새나라 건설’ 등의 표어를 사용하며 의복을 간소화하지 않은 사람들은 곧 검소하지 않은 사람,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게 짧은 말 한마디가 주는 영향력은 실로 놀라웠다. 그 때문에 표어를 사용하는 곳은 늘어만 갔다. 1980년대 이후 지나친 표어 사용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짧은 문장 속에 함축된 말들은 자칫 사람의 사고를 획일화시킬 수 있다는 문제도 지적되었다.

“불조심을 강조하고 청소를 강조하지만, 강조가 너무 잦으니 오히려 강조라는 말의 의미가 퇴색되는 흠이 있다.”(「전시(展示)행정과 표어(標語) 불감증」, 경향신문 1988년 3월 7일자 칼럼)

표어-화재는 계절없고, 불행은 예고없다 참고 이미지
표어-화재는 계절없고, 불행은 예고없다(1986)
표어-많이 낳아 고생말고 적게 낳아 잘 기르자 참고 이미지
표어-많이 낳아 고생말고 적게 낳아 잘 기르자(1964)

말은 번듯하지만, 실천 여부는 미지수라는 지적일 것이다. 거기다 표어 팻말의 맞춤법이 틀리는 실수들도 종종 발생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다. 안전띠 착용이 의무화된 이후에는 버스 안에서 "안전벨트를 반듯이 맵시다"라는 표어가 붙었는데 ‘반듯이’가 아닌 ‘반드시’라 고쳐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으며, 또 다른 문제는 표어에 일본식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금연에 관한 표어에서 “직장에서의 담배, 보다 안전하게 보다 건강하게”에서 ‘보다’라는 일본식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점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더욱’으로 바르게 고쳐 쓰자는 주장도 나왔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표어이니만큼 운율과 말의 느낌만을 살리는데 치중하는 것이 아닌 바른말 표어가 절실하다는 의견이었다. 이 모두가 수시로 바뀌는 각 기관의 표어와 너무 많은 표어의 생산으로 생겨난 부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쥐잡기 운동 포스터 참고 이미지
쥐잡기 운동 포스터(1972)
마약 추방 관련 표어를 들고 있는 청소년 단체 참고 이미지
마약 추방 관련 표어를 들고 있는 청소년 단체
(1990)
종합청사 현관 경제살리기 운동 표어 참고 이미지
종합청사 현관 경제살리기 운동 표어
(1997)

수천 개의 표어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표어 하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부의 산아정책을 담은 표어일 것이다. `소(少)→3→2→1→2→다(多)'. 누군가는 우리나라 출산 관련 표어의 변천사를 이렇게 요약하기도 했다. 1960년대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에서 1970년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그리고 1980년대엔 둘도 많다며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라는 표어 아래 ‘아이 하나 낳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저출산에 대한 우려가 본격화된 2004년에는 ‘아빠! 하나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란 표어가 등장했는데, 196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의 산아제한 표어 때문인지 현재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데는 표어가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말보다 현실적인 대책을 더욱 중요하게 따져보는 시대가 된 것이다.

과거 표어는 정책의 목적과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 내 왕따 문제, 노인 치매예방과 층간소음 등 국민의 현실적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확대되어 활용되고 있다. 한마디 말의 가치를 천 냥에 비유한 속담처럼, 지금껏 우리에게 표어는 천 냥 그 이상의 역할과 영향력을 보여준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시대를 말해주는 표어, 대한민국의 오늘을 대표하는 표어는 훗날 어떤 모습으로 이 시간을 말해줄지 자못 궁금해진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경향신문, 「‘그때’를 풍미했던 말…말… 」, 1985.8.17.
  • 경향신문, 「30여 년 수집해 온 최림길 씨 "표어는 時代相(시대상)의 산 증거"」, 1992.9.19.
  •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 매일경제, 「地球(지구)는 滿員(만원)이다. "出産(출산)을 조절하자"」, 1974.3.28.
  • 한겨레, 「당국 표어 일어식 표현 일쑤, 」, 1992.6.5.
  • 한겨레, 「버스 안 표어 팻말 맞춤법 틀려 눈살」, 19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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