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세계적으로 자연을 보호하고 특히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종이절약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종이 절약운동은 이보다 피부에 더 와 닿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종이를 만드는 펄프를 전량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다보니 수입비용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1980년대 까지 종이원료의 수입은 우리나라 전체 수입량의 10%에 달할 정도였다.
광복직후부터 종이문제는 언제나 국무회의에 오르는 회의감이었는데, 1980년대 중반까지도 종이절약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다.
1950~60년대 국무회의 대통령 훈시를 보면
“용지 사용을 절약하기 위하여 각 부처 장관은 노력하여 주기 바란다.”,
“각 부처에서 사용되는 용지, 기타소모품을 절약토록 하라”,
“관용의 봉투나 그 밖의 용지 등을 뒤집어쓰는 등 소비절약에 적극 협조하여야 할 것이다”
등 종이 절약이 강조되었으며, 문화 영화를 제작하여 국민들에게 종이 소비를 줄일 것을 계몽하기도 하였다.
종이소비 절약운동이 본격화 된 것은 1970년대 초반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석유파동 때문이었다. 1973~1974년, 1978~1980년 2차례 걸친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原油) 가격인상과 원유생산의 제한으로 세계 각국에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났다. 석유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인플레이션과 불황을 맞았고 펄프를 비롯한 석유화학부분 원자재들의 가격이 대폭 인상되었다.
우리나라도 이 석유파동의 영향을 받아 수입원가 폭등으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정부에서는 이때 범국민적 물자 절약운동을 시작했는데, 특히 원유가격 상승으로 종이 원료인 펄프의 품귀현상, 가격상승 등이 일어남에 따라 종이 절약운동과 폐휴지 수집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실시된 종이소비절약운동은 그 절약방법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당시 종이를 많이 쓰는 곳은 정부기관이나 기업, 학교 등이었기에 이를 중심으로 종이절약이 특히 강조되었다.
1973년 10월 27일 상공부는 국제적인 펄프 가격 상승과 심각한 용지난에 대비하여 헌 종이 재이용센터를 설립하여 전국적인 종이소비 절약운동을 추진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펄프 부족에 대비한 국내 수급 대책으로는 대단위 화학 펄프공장과 볏짚 펄프공장 신설, 고급 펄프 사용 억제, 헌 종이 재생·활용 등을 제시하였다. 상공부는 이 같은 방침에 따라 헌 종이 재이용센터를 설립하고 한번 사용한 종이나 휴지로 버려진 종이를 수집하여 이를 다시 활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각 제지회사에게 탈묵 펄프시설을 의무화함으로써 폐지에서 잉크와 섬유를 분리해 재생 펄프를 생산하도록 하였다.
1974년 3월 25일 국무총리는 문공부 장관에게 정부간행물 조정심의위원회의 기능과 운영을 강화해서 정부 및 산하단체 그리고 국영기업체에서 발행하는 각종 간행물의 발간부수를 대폭 감축하고 정기간행물의 발간 순기를 감축 조정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총무처 장관에게는 비밀문서를 소각하지 않고 이를 분쇄함으로써 그 원자재를 다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도록 했다. 또, 정부기관의 폐휴지 수집처리를 위한 정기적인 회수일을 설정하는 등 제도적인 수집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정부기관은 용지 소비절약을 위하여 공문서는 양면활용을 원칙으로 하며, 모든 용지는 저급지로 대체하고 폐휴지의 소각을 금지하며 재활용이 가능한 각종 교재, 유인물 등은 회수하여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 등이 제시되었다. 이때 한 정부 기관에서는 한번 썼던 서류봉투를 5번 까지 재활용한 예도 있었다.
정부의 이런 시책에 따라 학교에서는 매달 폐품수집으로 각종 폐지를 거두어 들였으며, 이면지 활용이 적극 권장되기도 하였다. 기업이나 학교에서는 폐지수거함을 마련해서 따로 폐지를 모으기도 하였다. 이런 종이소비 절약운동은 70년대를 넘어 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최근 디지털시대가 도래하면서 종이 소비량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종이 소비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