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광복 이후 일본이 돌아가고 난 뒤, 한 안과의사는 후배 양성을 위한 교재를 만들 결심을 한다. 일본어로 된 『소안과학』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로 한 것이다. 그가 번역한 글은 두 명의 조수가 깨끗하게 다시 정리했지만, 조수들이 필기한 원고는 막상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었다. 다시 확인해서 쓰는 번거로움은 둘째 치더라도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을 참지 못한 안과의사는 한글 타자기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가 바로 ‘한글기계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공병우였다.
물론, 그 이전에 한글 타자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글 타자기는 1914년 재미교포 이원익이 영문 타자기에 한글 활자를 붙여 고안한 모델이 최초였고, 1929년 무렵에는 송기주가 언더우드의 휴대용 타자기를 개조하여 네벌식 세로쓰기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송 씨가 발명한 것은 단지 마흔 두 개의 키를 가지고 어떠한 조선 글이든지 어떠한 철자법이든지 다 찍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영문이나 독일문 타자기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진실로 조선글을 위하여서는 획기적인 큰 발명이다.”(「長白山人, 一事一言:송기주 씨의 한글 타자기」, 조선일보 1934년 3월 2일자 기사)
광복 이후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며 한글 타자기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기존의 ‘세로쓰기’ 방식이 아닌 읽기 편한 ‘가로쓰기’가 장려되면서 새로운 타자기가 필요했다. 이에 1949년 3월 '조선발명장려회'는 한글 타자기 현상 공모를 개최하였다. 이 공모에 1등 당선자는 없었다. 그러나 2등 수상자 중 한 명이 공병우였고, 3등 수상자 중 한 명이 김동훈이었다. 공병우는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의 원리를 이용해 한글 자판을 만든 세벌식 타자기를 선보였다. 한글의 조형미보다 기능성을 강조해 로마자 타자기 부럽지 않은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반면 김동훈식 타자기는 세로 모음과 함께 쓰는 초성, 가로 모음과 함께 쓰는 종성, 받침 없는 중성, 받침과 함께 쓰는 중성, 종성으로 이루어진 다섯 벌 타자기를 선보였다. 타자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글씨가 예뻤다.
두 타자기의 장․단점은1960년대 타자기의 보급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국방부, 외무부 등 사무 처리의 속도를 우선하는 기관은 공병우식 타자기를, 문교부, 원호처 등에서는 김동훈식 타자기를 선호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한글 타자기 개발에 대한 관심은 194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당시에는 한글전용정책 시행 전으로 한자와 함께 작성할 수 없다는 단점 때문에 행정기관에서는 타자기를 선호하지 않았다.
6.25전쟁 중인 1952년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행정사무의 능률을 위하여 공병우 타자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전군에서 공병우 타자기를 사용하는 타자수가 양성되었는데, 문제는 공병우식 타자기를 사용하는 기관도 있었지만, 김동훈식 타자기를 사용하는 기관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두 타자기의 공존은 한글 자판의 혼란을 가져왔다. 1957년 문교부에서는 ‘한글 타자기 글자판 합리적 배열 협의회’를 결성해 한글 타자기 글자판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한글 자판의 통일화 과정에서 핵심은 모아쓰기와 풀어쓰기였다. 모아쓰기는 지금 우리가 아는 한글의 작성방식이다. 풀어쓰기는 예를 들면 `한글'을 `ㅎㅏㄴㄱㅡㄹ'로 적는 방식인데, 주시경, 최현배를 비롯한 초기 한글학자들이 제안한 바 있다. 로마자처럼 한글을 표시하기 때문에 기존의 로마자 타자기를 한글로만 대체한 뒤 그대로 사용하면 된다는 편리성이 장점이었다.
1957년 5월 29일 문교부 편수국장실에서 개최된 ‘한글 타자기 글자판 합리적 배열 실무자 협의회’의 회의 기록을 보면, 모아쓰기 글자판 배열에 대한 토의와 풀어쓰기 글자판 배열에 대한 토의가 있었는데, 두 가지 방법을 충분히 고려해 합리적인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던 점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채택된 글자판은 실용화되지 못했다. 그 후 1962년 한글학회 등 민간에 의한 표준화 작업도 시도되었지만,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68년 7월 28일 국무총리 훈령(제81호)으로 한글 자판의 표준 자판이 확정된다. 그런데 뜬금없게도 네벌식 자판이 채택되는데, 당시 사용되고 있던 공병우식 타자기도, 김동훈식 타자기도 아니란 점에서 기존 제품 제작자들의 반발을 샀다.
타자기가 대중들에게 보급된 것은 1956년 미국대외원조처(USOM)이 문교부를 통해 전국 11개의 상업고등학교에 타자기를 무상으로 보급하면서부터였다. 1963년 문교부가 상업고등학교 실업과에 타자를 교과목으로 배정했지만, 타자교육이 활성화된 것은 1969년부터였다. 한 은행이 은행원 채용을 위해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 50명의 채용 추천을 의뢰했는데, 이때 학업성적과 더불어 타자기능이 우수한 졸업예정자를 선발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타자교육의 붐이 일어났다.
그 후 1970년 문교부는「타자능력검정시험규칙」을 공포했다. 제한시간 5분에 최저 정타수 1,250타를 치는 자에게 1급을 주었고, 그 밑으로 5급까지 두었다. 1979년 문교부는 국정 한글타자와 영문타자 교본을 발행, 타자교육의 보급을 꾀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가 학생들에게 경방기계공업주식회사 제품인 클로버타자기를 개인 장비화할 것을 권유했는데, 3,000명의 재학생 중 1,000명이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타자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개인용 컴퓨터의 탄생으로 타자기는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최근 타자기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러시아 등 외국의 몇몇 국가에선 국가자료의 유출을 막기 위해 컴퓨터 대신 타자기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개인정보 유출로 꺼림직한 요즘, ‘탁탁탁’ 경쾌하게 들리던 타자치는 소리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