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메뉴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내용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1m의 길이를 정하다

한때이기는 하지만 매년 10월 26일 ‘계량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10월 26일은 세종대왕이 계량법을 통일한 날로 1966년부터 이날을 기념하였고, 이후 1973년 각종 기념일의 통폐합 방침에 따라 계량의 날은 상공의 날로 통합되었다. 계량의 날을 따로 정할만큼 도량형은 우리 생활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 중요성을 알려주는 일이 1999년 9월에 있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무인 화성 탐사선이 대기와 마찰을 일으키며 폭발했는데 조사 결과, 실패 원인은 도량형이었다. 탐사선을 제작한 회사는 미국 전통 도량형인 야드파운드법 단위를 적용하였고, 미국 항공우주국은 미터법을 사용하다 보니 계산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사소한 도량형 사용의 혼선으로 약 1,500억 원이 허공에 뿌려지고 말았다.

[대한뉴스 제454호] 미터법 실시
[대한뉴스 제454호] 미터법 실시(1964)

인체를 이용한 도량형의 시작

도량형은 길이나 무게, 부피를 계측하는 기기로서 단위법을 총칭하는 말이다. 요즘과 같이 저울이나 자 같은 것이 없었던 옛날에는 도량형의 기준이 인체의 각 부위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큐빗이라 하여 이를 이용해 피라미드를 지을 때 사용했다. 피트는 영국 왕 헨리 1세의 발 크기를 기준으로 정했는데, 어른 남자의 발 크기를 기준으로 발뒤꿈치에서 부터 엄지발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쟀다. 1피트는 30.48cm이다. 영국의 인치는 엄지손가락 첫 마디의 길이를 기준으로 2.54cm이다. 야드는 팔을 뻗었을 때 몸의 중심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91.44cm이다. 중국의 자는 손을 폈을 때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로 척(尺)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는 척관법(尺貫法)을 사용했는데,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전해져 내려온 도량형 제도인 척관법은 길이의 단위는 척(尺), 양의 단위는 승(升), 무게의 단위는 관(貫)으로 하였다.

우리나라의 도량형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뿐만 아니라 금석문 자료 등에서 당시의 도량형 단위에 대한 기록이 있고, 현재에도 여러 도량형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도량형은 구체적으로 언제 정비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계승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인체를 이용한 단위가 있었다. 푼과 치는 작은 단위로 손가락 한마디가 기준이었다. 뼘은 엄지와 인지를 쭉 폈을 때의 길이로, 자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길이로 하면 약 20cm였다. 발은 두 팔을 잔뜩 벌린 길이, 보는 사람이 두 발을 모두 걸었을 때를 뜻하는 말로 6자, 약 120cm가 된다. 리는 360보로 약 400m가된다. 그런데 이렇게 신체를 이용해 길이를 재다보니 정확성도 떨어지고 여러 혼란이 야기되었다. 조선의 4대왕 세종은 이를 고치기 위해 일정한 길이를 가지는 단위를 만들기로 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기본음을 내는 ‘황종관’을 만들도록 했다. 황종관은 음률의 기본인 십이율을 정하는 척도로서 대나무나 구리로 만든 관이었다. 세종은 기장이라는 곡물 중 크기가 중간 정도의 것을 골라 100알을 황종관에 나란히 놓은 길이를 1척으로 정했다. 도량형의 기본단위가 되었던 황종척 1척의 길이는 대략 34.48cm였다. 이렇듯 세종은 도량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자와 자의 길이, 부피와 부피의 단위, 그리고 무게와 무게의 단위를 정비하였다.

미터법 계량 단위 전용 국민운동방안
미터법 계량 단위 전용 국민운동방안(1962)

미터법의 시작

교통, 통신이 발달하면서 나라간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런데 나라마다 쓰고 있는 도량형이 다르다보니 무엇보다 단위를 통일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미터법이다. 미터법은 길이는 미터(m), 부피는 리터(ℓ), 무게는 킬로그램(kg)을 기본단위로 하는 도량형 단위법이다.

미터법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까지 사용되던 수 백 개의 단위로 인해 불공정한 거래가 생겨났고 이는 프랑스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혁명정부는 개혁의 정신을 기반으로 도량형을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1791년 ‘지구 자오선 길이의 4,000만 분의 1’을 1m로 하자고 정하였다. 일정 기준이 정해지자 미터법이 쉽고 우수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1875년 프랑스에서 17개국이 모여서 국제회의를 열었고 이때 미터법 조약이 체결되었다. 1889년 제1회 국제도량형총회에서 백금과 이리듐의 합금으로 미터원기를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미터법이 확립되었다. 1983년 제17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1m의 기준을 빛이 진공 중에서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진행하는 경로의 길이로 다시 정의하였다. 현재 미국은 미터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근대 이전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도량형의 기준은 척이었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서양문물의 유입과 외국인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도량형법도 국제적인 기준을 따를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갑오개혁 때 신식 도량형제를 반포하였으나, 이때는 그다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대한제국 수립 후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해 1902년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도량형 담당관청을 설립하여 자, 말, 저울 등을 만들고 검사를 하였다. 또한 미터법을 도입하여 서구식 도량형 규칙을 제정하였다. 1905년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제정·공포하고 농상공부령으로 도량형기 판매 규칙을 정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도량형제가 도입되어 일본식 도량형 단위인 돈, 관, 평이 우리의 전통적인 단위와 혼용돼 사용되었다.

광복 후 정부에서는 도량형 통일을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1959년 국제미터협약에 가입하였고, 1961년 「계량법」을 제정하여 법정계량의 기본단위를 미터법으로 정하였다. 이 법을 근거로 1964년 1월 1일부터 척관법, 야드·파운드법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모든 계량업무에는 미터단위계를 사용하도록 법제화하였다. 비로소 기존의 복잡하고 불편했던 도량 단위가 통일되었다. 미터법을 통해 적정한 계랑을 실시하여 공정한 상거래 질서의 유지와 산업선진화에 이바지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미터법은 막상 실생활에서는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오히려 국민들은 여러 가지의 도량 단위 사용으로 더 혼란스러웠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미터법이 정착하도록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였다. 1962년 국무회의 보고 자료를 보면, 미터법 통일운동이라는 것을 벌여 미터법이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조기 정착될 수 있도록 다양한 계도활동을 전개해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를 잴 때에는 미터(m) 만 사용하자’, ‘바로 재고 바로 달자 단골손님 늘어난다’ 등의 표어가 있는 포스터를 붙여 미터법 사용을 장려하였다. 또 척관법의 불편함과 미터법의 효율성을 홍보하는 문화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출판물이나 방송프로그램에도 도량 단위를 미터법으로 표기해 출간, 방영했다. 1964년 미터제의 표시가 없는 도량형기를 사용했을 때에는 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렸고 이런 기구를 양도했을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했다.

표준계량단위를 사용하자
표준계량단위를 사용하자(1968)

우리나라는 1978년 국제법정계량기구에 가입했고, 1983년 1월 1일부터는 토지 건물에 사용되는 평(坪)도 사용을 금지하는 등 미터법 표기를 의무화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곱미터(㎡) 보다는 평을 더 많이 쓰고 무게를 잴 때에는 킬로그램(kg)보다는 근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결국, 2007년 7월 1일부터 정부에서는 법정 계량단위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정해 무의식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는 비법정 계량단위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법정 계량단위란 미터법이 현대화 된 국제단위계이며 m, ㎏ 등이 기본 단위로 사용된다. 부동산·토지면적 단위인 제곱미터(㎡), 귀금속 무게의 단위인 그램(g)등이 대표적이다.

오래된 관습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 법. 과거의 단위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 새로운 계량단위체계도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정착하게 될 것이다.

(집필자 : 황은주)

참고자료

  • facebook
  • twitter
  • print

주제목록 보기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