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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서울의 아침은 평화로웠다. 때 마침 일요일이라 늦잠에서 깨어난 사람들 중에는 도심의 몇 안 되는 극장에서 열리는 악극단 공연을 보러 갈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아침밥을 먹고 막상 거리에 나섰을 때,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하더니 극장 부근에 도착하자 군용차량들이 마구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군용차에 매단 스피커에서 다급한 가두방송이 흘러나왔다.

“휴가나 외출 중인 장병 여러분! 모두 부대로 즉시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그때야 사람들은 뭔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새벽 4시 미명을 기해 38선 전역에서 북쪽 괴뢰군의 전면적인 불법남침이 있었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용맹스런 우리 국군은 즉각 반격을 개시해 적을 물리치고 있다고 했다. 시민들은 혹시나 하면서도 믿었다. 이미 그 전에 38선 부근에서는 툭하면 국지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전면전이라고 해도 설마 했었다. 세계전쟁사상 유례가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용감한 우리 국군이 적을 무찌르고 있다는 소리는 거짓말이었고, 적들은 오전에 벌써 개성방어선을 격파했고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시킨 상황이었다. 전쟁 발발 하루만인 6월 26일에는 의정부가 적의 손에 넘어갔고, 그 다음날에는 창동방어선까지 뚫려 황급히 미아리방어선을 구축했지만 곧바로 인민군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소위 북한의 작전명으로 ‘폭풍’이라는 전쟁, 6월 28일 새벽에는 서울 시내가 점령돼 공산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그 바로 직전에 한강다리를 폭파했지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적군의 기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6.25전쟁 발발과 휴전협정까지 썸네일 이미지
6.25전쟁 발발과 휴전협정까지(1969)

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대규모 북한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날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저녁에는 육본장교클럽 낙성파티에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대거 초청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그리고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들이 외출한 상태였다. 한 마디로 아무런 대비 없이 당한 전쟁이라 우왕좌왕 허둥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을 비교해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장갑차는 한국군 20여 대, 북한은 54대, 전차는 한국군 전무(全無), 북한은 242대, 곡사포는 한국이 118문에 사거리 5,600미터, 북한은 자주포까지 포함해 600문에 사거리 1만 미터 이상, 군용기는 한국군이 훈련기까지 포함해 겨우 22대, 북한은 전투기를 포함해 모두 120대, 그 밖의 박격포와 대전차포 등에서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병력 숫자만 해도 대한민국은 104,559명, 북한은 198,380명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유엔의 결의에 의해 그 해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고, 바로 다음날인 7월 8일에는 유엔의 깃발이 처음으로 한국의 전쟁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 영국, 터키, 그리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캐나다, 프랑스, 태국, 노르웨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콜롬비아, 덴마크, 네덜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에티오피아까지 기꺼이 참전했다.

한편 대전(大田)을 넘어선 북한군은 진로를 호남 쪽과 경북 왜관, 영천과 포항 등 세 방면으로 나눠 침공을 계속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때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밀려나 있었고, 한미연합군은 낙동강을 최전선으로 이른바 ‘워커라인’을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풍전등화의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는 부산에는 몰려든 피란민들로 일대 아수라장이었다. 이때 낙동강 교두보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그야말로 맨주먹 붉은 피로 적과 맞선 어린 학도의용군들의 희생은 눈물겨운 혈투로 전사(戰史)에 기록되었다. 자발적인 여성의용군도 조직돼 힘을 보탰다.

38선 기준 정전반대 국민대회 썸네일 이미지
38선 기준 정전반대 국민대회(1951)
서울로 피난온 초등학교 학생들 썸네일 이미지
서울로 피난온 초등학교 학생들(1951)
서울로 피난온 초등학교 학생들 썸네일 이미지
서울로 피난온 초등학교 학생들(1951)

전쟁이 발발한지 석 달이 채 못 되는 9월 15일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9월 28일에는 서울중앙청에서 역사적인 서울 수복식이 거행되었다. 드디어 반격을 개시한 연합군은 38선을 돌파, 북진을 거듭해 평양탈환은 물론이고 압록강 국경지대 초산까지 이르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진중군가 ‘전우야 잘 자라’는 이 무렵에 나왔다. 이제야 전쟁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그것도 잠시, 28만 명의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전선은 소용돌이쳤다. 혹독한 추위 속에 완전 포위된 미군의 퇴로를 열기 위해 벌인 장진호지구전투와 흥남부두철수작전으로 이어지는 끔찍한 1.4후퇴를 겪었다.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고 미군 수송함에 실려 온 수많은 피란민들은 이미 포화상태가 된 부산에 입항도 못한 채 거제도로 향했다.

국군 평양입성 환영대회 썸네일 이미지
국군 평양입성 환영대회(1950)
서울 수복 후 태극기 게양 썸네일 이미지
서울 수복 후 태극기 게양(1950)
징병입대 광경 썸네일 이미지
징병입대 광경(1951)

일진일퇴, 후퇴와 반격을 거듭하면서 밀리고 쫒기는 한편으로는 휴전회담이 시작된다. 백마고지에서, 진부령에서, 옹진반도에서, 낙동강교두보에서, 다부동에서, 형산강전투에서, 지평리, 가평, 춘천, 파주, 문산, 강릉, 의정부, 동두천, 포천, 그리고 철의 삼각지에서 서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 사이 희생은 늘어났고, 국토는 전쟁의 상처로 폐허가 되어 갔다.

여자의용군 행진 썸네일 이미지
여자의용군 행진(1952)
휴전협정 회담 관계자(유엔군측 대표)  썸네일 이미지
휴전협정 회담 관계자(유엔군측 대표)
(1953)
수복지역 행정권 이양식 썸네일 이미지
수복지역 행정권 이양식(1954)

그리고는 끝내 1953년 7월 27일 허망하게도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3년여의 전쟁이 끝나고 38선 대신 새롭게 휴전선이 형성되었고, 이 시각부터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와 양측의 적대적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만 해도 국군과 유엔군을 포함해 약 18만 명이 전사, 민간인 99만과 경찰관 1만여 명의 희생으로 나타났다. 국군부상 45만 명에, 포로 8,343명(당시 송환된 포로 수), 유엔군부상 103,460명에, 포로 5,817명(당시 송환된 포로 수)에, 북한군 사망은 약 52만 명 추산, 양쪽의 행방불명실종자도 1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전쟁미망인 20만 명, 전쟁고아 10만여 명도 생겨났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산하에는 숱한 전투전적비들이 세워졌고, 가로지른 철조망엔 긴장감만 감도는데, 피로 물든 강산 곳곳에 묻힌 이름 모를 용사들의 비목과 유해들은 무심한 세월을 한탄하는가.

이것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지역을 만든 6.25전쟁의 참상이었다.

(집필자 : 신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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