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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무시험제를 불러온 ‘무즙 엿 먹어보라’

1959년 초등학교 의무교육 정책이 시행되면서, 초등학교는 누구나 다니는 학교가 되고 대신 상급학교인 중학교 진학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는 중학교 입시과열 현상을 초래하였다. 그 와중에 이런바 ‘무즙파동’이 터졌다. 1964년 12월 서울시 중학교 입시 문제에 ‘밥으로 엿을 만들려고 한다. 만약 엿기름이 없다면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나왔다. 사지선다형 보기에는 ①디아스타제 ②무즙 ③꿀 ④녹말 등 네 개가 있었는데 정답은 ①디아스타제 였다. 그런데 논란이 일어났다. ②무즙도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자연교과서에는 ‘침이나 무즙에도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있다’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교부가 ‘①디아스타제 만 정답’이라고 하자 학부모들은 교육청으로 대거 몰려갔다. 결국 이 논란은 ‘무즙재판’으로까지 이어졌다. 재판부는 “실제로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는지 전문기관에 실험을 의뢰한 결과, 무즙으로는 엿을 만들 수 없는 결론을 내린 바, 원고 측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기어코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냈다. 이 일로 ‘엿 먹어라’는 말이 당대 유행어가 되고, 1964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에는 “무즙 엿 먹어보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결국 법원은 ‘무즙도 정답으로 해 주겠다’고 판결을 뒤집어, 38명의 학생이 구제되었다. 그러나 경기중, 서울중, 경복중 등 명문중학교에 추가로 입학한 학생 숫자는 59명으로, 추가입학의 어수선한 과정을 타 부정입학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 대부분이 특권층과 부유층 자제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자식을 부정입학시킨 고위공무원들이 대거 해임되고, 서울시 교육감과 문교부 차관도 파면되는 희대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점수 1점 차에 입시의 승패가 좌우되던 시절이었다. 명문 중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려는 부모의 교육열로 인해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을 인생에서 패배자로 낙인찍는 것과 같은 악영향을 미쳤고, 입시철이 되면 가출 사고와 자살사고도 잦았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은 지금의 ‘고3병’과 같은 ‘국6병’을 앓으며 입시지옥을 견뎌야했던 것이다.

군사원호청 유가족자녀 중학교 입시 썸네일 이미지
군사원호청 유가족자녀 중학교 입시
(1961)
전기 중학교 입시 썸네일 이미지
전기 중학교 입시(1967)
중학교 입시 체능고사 썸네일 이미지
중학교 입시 체능고사(1967)

어린 학생들을 치열한 입시전쟁에 내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정부는 1968년 7월 15일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를 발표하였다. ‘7·15입시개혁안’은 아동의 정상적 발달 촉진, 초등학교 교육의 정상화, 과열 과외공부의 해소, 극단적인 학교 간 격차의 해소, 입시준비로 인한 과도한 학부모 부담의 경감 등을 세부 목표로 하였다. 당시 권오병 문교부 장관은 “초등학생들에게 과도한 입시준비교육, 즉 과외공부를 시킨 결과 소위 일류병과 입시준비교육이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병폐가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중학교 입시를 완전히 없애겠다.”고 했다. 문교부장관의 전격적인 발표는 ‘교육혁명’으로 불릴 만큼 온 사회를 놀라게 했으나, 전국의 초등학생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중학교 무시험추첨 수동식 배정 썸네일 이미지
중학교 무시험추첨 수동식 배정(1969)
중학교 무시험 추첨기호 발표 썸네일 이미지
중학교 무시험 추첨기호 발표(1978)
중학교 무시험 진학 배정 컴퓨터 시동식 썸네일 이미지
중학교 무시험 진학 배정 컴퓨터 시동식
(1981)

중학교 무시험입학제는 1969년 서울을 시작으로, 1970년에는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10대 대도시로 확대되었고, 1971년에는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당시 중학생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과 가까운 학교 중학교 한 개를 고르는 학교배정 추첨은 아이들이 스스로 추첨기를 돌려 당첨된 구슬에 따라 진학할 중학교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일명 ‘뺑뺑이’라 불렀다. 중학교 무시험제 도입 이후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을 ‘뺑뺑이 세대’라 부른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중학교 무시험제도 이후 정부는 일류학교로 불리던 경기중·경복중·서울중·경기여중·이화여중을 폐쇄하였으며, 증가하는 중학교 진학 수요 때문에 지속적으로 중학교 시설을 확충하였다. 1969년에는 377개의 학교가 신설되었고, 8,579개의 교실을 신축하였으며, 11,517명의 교원을 증원하는 중학교의 폭발적 팽창 시기를 맞이하였다.

중·고교 평준화가 ‘실력 없는 평준화 세대’ 로 이어지지 않아야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 수가 급속하게 증가하자, 고등학교 진학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였고, 고등학교 입학 경쟁 또한 더욱 치열해졌다. 이는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도입되면서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였다. 중학교 진학단계에서 과열경쟁으로 빚어졌던 초등교육의 파행 및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은 해소되었으나, 초등학교의 입시준비교육이 중학교 단계로 옮겨가면서 고등학교 입시준비는 더욱 과열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에 따라 문교부는 1972년 ‘입시제도 연구협의회’를 구성하여 개혁안을 마련하였고, 1973년 ‘고등학교 입시제도는 학군제, 과정별 지원, 추첨배정으로 한다.’는 내용의 ‘고교평준화 정책’을 발표하였다.

고교평준화 추진상황 썸네일 이미지
고교평준화 추진상황(1973)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부터 고등학교 평준화가 적용되기 시작해, 1975년에는 대구, 인천, 광주로 확대되었다. 중고교 평준화 정책 도입 초기 소위 일류 고등학교 관련 인사들과 한국사학재단연합회, 대한교육연합회(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등은 평준화 정책의 폐지 혹은 대폭적인 수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한국교육개발원에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대체로 긍정적이며 학력 저하 주장 등은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정책보고서를 내놓으면서, 기본 취지와 골격을 유지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1979년에는 대전, 전주, 마산, 청주, 수원, 춘천, 제주 등의 도청 소재지로 확대되었으며, 1980년에는 지방 주요 도시로 평준화 지역이 확대되었다. 1982년에는 평준화 정책을 보완하여, 보충수업 및 교과·능력별 이동수업의 의무화, 영재교육 실시, 학군 및 학교 재배치 계획 등이 수립되었다.

민관식 문교부장관 중고등학교 평준화에 대한 기자회견 썸네일 이미지
민관식 문교부장관 중고등학교
평준화에 대한 기자회견(1973)
경기고등학교 연합고사 수험생들 썸네일 이미지
경기고등학교 연합고사 수험생들
(1980)

1980년대 말부터는 학교의 학생선발권이나 학생의 학교선택권에 대한 인식의 확산, 그리고 지방자치제의 실시 등으로 평준화 실시 및 해제에 관해서는 각 지역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80년대 지속적 성장의 화두로 과학기술분야가 중요시 되고 이와 연계된 교육열풍으로 인해 1982년부터 과학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1990년부터는 외국어 고등학교가 설립돼 이들 학교를 특수목적고등학교로 지정하여 평준화 정책을 보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울러 예·체능계열의 학교들은 평준화 대상의 예외로서 1970년대부터 이미 개별학교 지원에 의한 경쟁 입학을 허용해 왔으며, 2000년에는 「영재교육진흥법」이 제정되어 영재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었다. 이는 평준화정책이 일반적인 학생들에게만 국한될 뿐, 성적 우수자 혹은 특기자들에게 있어서는 비평준화 시대의 ‘명문고’ 혹은 ‘일류고’와 마찬가지인 진학 열풍이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중·고교 평준화는 학력 차이가 큰 학생들이 같이 공부하게 되면서 ‘실력 없는 평준화세대’를 길러낼 수 있다는 우려도 있으나, 상급 학교 교육을 받을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이점도 있다. 앞으로도 교육의 평등한 기회 보장과 건전한 경쟁의 발판을 제공할 수 있는 개선책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 3』, 인물과사상사, 2004.
  • 교육인적자원부, 『교육50년사』, 교육인적자원부, 1998.
  • 교육인적자원부, 『교육통계연보』, 교육인적자원부, 2005.
  • 동아일보, 「무汁(즙) 엿 먹어보라」, 1964. 12. 22.
  • 한국역사연구회,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권』, 한국역사연구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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