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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태권브이가 나온다는 국회의사당 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 국회의사당 돔이 열리고, 그 속에서 로봇 태권브이가 출동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2011년 1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전설의 돔 오픈 이벤트’가 열렸다. 이날 오후 6시 30분 거대한 국회의사당 돔이 열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만화 주제가에 맞춰 태권브이가 위풍당당하게 몸체를 드러냈다. 물론 진짜 로봇 태권브이는 아니었다. 의사당에 특수 빔을 쏘아 돔이 열리고, 태권브이가 움직이는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행사가 열리게 된 것은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국민들이 단합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국민들의 의사를 전달하는 곳,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곳, 국민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곳. 이것이 바로 국회의사당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의 정치 역사를 고스란히 안은 국회의사당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로 48, 옛 주소로 여의도동 1번지의 1에 있는 국회의사당은 여의도 전체면적의 1/8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국회의사당은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이며 길이 122m, 폭 81m로 단일 의사당 건물 중에는 동양에서 제일 크다. 이 국회의사당 가장 윗부분에 밑지름이 64m, 무게 천 톤의 거대한 돔이 있다. 이 돔을 8각 기둥 24개의 각주가 바치고 있는데, 24개의 각주는 24절기를, 전면의 기둥 8개는 전국 8도를 상징한다.

국회의사당 건물 썸네일 이미지
국회의사당 건물(1956)
이승만 대통령 남산 국회의사당 신축지 시찰 썸네일 이미지
이승만 대통령 남산 국회의사당
신축지 시찰(1959)
극회의사당 신축기공식 시삽 썸네일 이미지
극회의사당 신축기공식 시삽(1969)

6.25전쟁 이후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던 국회의사당은 1975년 한강의 가운데 조그만 섬 여의도로 옮겨갔다. 태평로 정치시대가 끝나고 여의도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이 처음 설계되었을 당시 국회의사당 지붕은 돔이 없는 평지붕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국회의사당건립위원회에서 지름 50m, 높이 20m의 돔 구조물을 옥상에 설치하기로 결정하면서 논란이 불거지게 되었다. 자문위원들의 심의를 거쳐 돔을 올리기로 했다는 의견과 건축 예술에 정치권력이 개입하는 부당한 일이라는 의견이 대립되면서 국회의사당 지붕을 돔으로 할 것이냐 평지붕으로 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논란 끝에 국회의사당 지붕에는 커다란 돔이 만들어졌다. 둥근 돔 지붕은 국민의 의견들이 찬반토론을 거쳐 원만하게 하나의 결론으로 모아진다는 의회민주정치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기도 하다.

총공사비 135억 원, 시멘트 64만 부대, 벽돌 850만 장, 연인원 1백만 명이 투입된 큰 공사가 6년 만에 끝나고 1975년 8월 국회의사당이 준공되었다. 동판으로 만들어진 돔은 처음에는 붉은 색을 띄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녹슬고 낡아 지금과 같은 색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2000년 6월에는 돔을 황금색으로 칠하기 위한 예산안이 국회 운영위에 제출됐지만 막대한 시공비가 드는 관계로 시행되지 못했다.

국회의사당 본관 상량식 썸네일 이미지
국회의사당 본관 상량식(1973)
국회의사당 준공식 썸네일 이미지
국회의사당 준공식(1975)
국회의사당 전경 썸네일 이미지
국회의사당 전경(1975)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사당은 서울 세종로 중앙청이었다. 이곳에서 제헌국회가 개원되었는데, 제헌국회는 광복 후 국제연합(UN)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구성된 국회를 말한다. 이때 중앙청이 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임시수도였던 대구 문화극장이 임시의사당 역할을 했다. 그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산 문화극장, 서울 종로구 중앙청, 서울 중구 시민회관별관, 부산 부산극장, 경남도청 무덕전 등 전쟁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곳이 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서울로 환도한 국회는 중앙청 중앙홀,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 대한공론사를 의사당으로 사용하다가 1975년 9월 1일에 현재의 여의도 의사당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대한뉴스 828] 여의도에 국회의사당 정초 썸네일 이미지
여의도에 국회의사당 정초(1971)

원래 국회의사당이 세워질 부지는 여의도가 아닌 사직공원 일대였다. 사직공원은 종묘와 함께 나라의 신과 곡식을 맡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성역에 가까운 곳이었다. 사직공원 일대가 국회의사당 부지로 결정된 것은 중앙청과 가까이 있고 넓은 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울에만 행정기능이 집중된다는 반론이 있어서 부지 결정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1967년 12월 27일 당시 공화당의 김종필 의장이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을 짓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이 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국회의사당이 자리 잡은 여의도는 원래 조선시대 궁녀들의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간혹 국회에 처녀 귀신이 출몰한다는 괴담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를 잠재우기 위해 국회사무처는 2008년 5월 18일 65톤짜리 거대 남근석을 세워 여인들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 현재 이 바위에는 ‘국민과 함께 하는 민의의 전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대한뉴스 1047] 국회의사당 준공 썸네일 이미지
국회의사당 준공(1975)

국회의사당에는 없는 것

국회의사당에는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지하 2층이 없다. 건물을 들어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국회의사당 건물은 지하 2층, 지상 6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2005년 지하 1층이던 본청 방문객 출입구를 지상 1층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때문에 각 층의 명칭에서 지하 2층을 없애 버리고 지하 1층부터 지상 7층까지로 고쳐버렸다. 국회의사당 홈페이지에도 국회의사당은 지하 1층에서 지상 7층이라고 되어 있다.

다음으로 국회의사당에 없는 것은 재떨이와 일반 명패이다.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다 의원들끼리 난투극을 벌이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때 재떨이와 일반 명패가 무기처럼 사용되었다. 그래서 맞아도 덜 다치고 소리만 큰 양은 재떨이로 바뀌었다가 후에는 아예 던지지 못하게 고정식으로 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힘센 몇몇 국회의원들이 이것까지 뜯어내기도 했는데, 1973년 2월 국회법으로 회의장 내 금연 조치가 내려지면서 재떨이는 아예 자취를 감춰버렸다. 명패의 경우에는 2005년 9월 본회의장이 전산화되면서 고정식 전자명패가 되었다. 하지만 상임위나 특위에서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플라스틱 명패를 사용하고 있다.

국회의사당을 찾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국회의사당 입구에 서 있는 해태상이다. 해태는 전설의 동물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국회의사당 앞에 이것을 세워놓은 이유는 나라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잘 감시하고 잘못을 바로 잡는 역할을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 1번지 국회의사당을 일터로 삼은 국회의원들에게 바라는 국민들의 염원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경향신문 디지털뉴스팀, 「로보트 태권V, 11일 국회의사당 돔 열고 출격」, 경향신문, 2011. 1. 11.
  • 고수정, 「국회 내 우뚝 솟은 '남근석' 을 아시나요?」, THE FACT, 2014. 8. 8.
  • 구희령, 「정치 1번지 지하에선 교회·성당·禪院이 이웃」, 중앙일보, 2008. 9. 22.
  • 대한민국국회(http://www.assembly.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