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번.
밀수 사범을 신고할 수 있는 전화번호다. 밀수품을 발견 즉시 ‘이리로’ 전화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번호라는 점이 독특하다. 신고할 경우 최고 5천만 원, 마약류의 경우 1억원까지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금은 밀수에 관해 우리 사회가 둔감한 편이지만, 과거엔 달랐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5대 사회악은 밀수, 도벌, 마약, 탈세, 폭력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범죄로 밀수가 꼽혔다. 망국적인 사치심을 조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도 이뤄지고 있는 세관의 밀수품 소각은 1957년 ‘소각’이냐, ‘공매’냐 두 가지 갈림길에서 여러 논란을 빚었다. 당시에는 밀수품을 소각하는 것이 경제적인 손실이 큰 것으로 판단되어 공매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1960년대 이후 이에 대해 엄중히 소각조치를 하는 추세로 변모하였다. (현재 세관은 재활용 가치가 없는 밀수품은 폐기하지만, 재활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의류, 농산물 등은 복지단체에 기증하거나 공매에 부치고 있다.)
그러나 1966년 5월 24일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당시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부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난 사건으로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벌금 2천여 만 원을 부과했지만, 사실 여부와 언론의 감싸기 문제로 한동안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밀수는 곧 망국으로 가는 흉악범죄라는 등식이 존재하던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대기업의 밀수행위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큰 사건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례적으로 이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언급하기도 했다.
“경제건설에 앞장서서 국가와 민족에 봉사해야 할 대기업이 민족이야 어떻게 되건, 나만 잘 살면 그만이고 나라야 망하건 말건 내 사업만 번창하면 그만이라는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밀수에 뜻을 둔다면, 이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탄되어야 할 반국가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박정희 대통령, 1966년 10월 3일 ‘개천절 경축사’ 중에서)
밀수가 늘 무거운 사회범죄로만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남대문시장은 과거 밀수품들의 주요 유통경로였다. 과거에는 도깨비시장이라고도 하였는데, 생활이 어렵던 시절 외국에서 밀수한 제품들이 내놓기 무섭게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수입 절차가 까다롭고 세금 부담이 컸던 당시에는 그만큼 수입품을 일반 서민이 만져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입제품에 대한 호기심과 한번쯤 사용해 보고 싶은 욕망이 맞물리면서 남대문시장은 호황을 누렸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 수요가 많아지는 만큼 가짜 제품이 판을 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밀수품으로 돈을 벌던 도깨비시장은 적법한 수입절차를 거친 수입품을 싸게 파는 형태로 변모했다. 우리나라의 수입제한이 대폭 완화된 것이 그 이유였다.
1950∼1960년대에는 우산, 재봉틀, 화장품, 라디오 등이 주로 밀수입됐다. 경제성장의 중흥기였던 1970년대에는 전자제품과 금괴가 세관을 피해 들어왔다. 1980년대에는 시계류와 보석, 밍크 코트류 등 고급 사치품이 인기를 끌었고, 최근에는 온갖 ‘짝퉁’의 밀수가 늘고 있다. 의류와 시계, 잡화, 한약재와 비아그라 등이 2000년대의 주요 밀수품목에 그 이름을 올렸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남해안 일대를 무대로 조직적인 해상밀수인 일명 ‘특공대 밀수’가 판을 쳤다. 소형목선에 탱크 엔진을 설치하여 30노트(시속 55.6㎞) 이상의 속도로 달리며 10노트 정도의 세관감시선을 따돌렸다.
1970년대에는 수출면장 없이 현지에서 외국으로 출항할 수 있는 활어선을 이용해 다량의 밀수품을 싣는 방식, 혹은 육지에서 가까운 바다 속에 있던 해녀가 이 밀수품을 운반했다.
1980년대에는 외국산 제품의 높은 세율을 피하고 싶은 여행자 밀수가 크게 늘었다. 1990년대에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으로 통관절차가 간소화되면서 컨테이너를 이용한 중국산 참깨 밀수, 한·중 여객선 보따리 상인들의 농산물 밀수가 성행했다.
2000년대 들어 나타난 일명 ‘커튼 치기’ 밀수는 컨테이너 앞쪽에 일반 무역물품을 적재하고 뒤쪽에 밀수품을 숨기는 방식이었다. 앞쪽의 물품을 모두 내려놓기 전에는 밀수품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정부는 밀수를 5대 사회악의 하나로 분류했지만, 정부의 단속 방식과 밀수 대응은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밀수 우범자들이 여행을 다녀오더라도 가방을 열어 그의 짐을 샅샅이 확인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과학장비 하나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밀수범들을 검거하고, 그들의 밀수품을 적발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부터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입국자의 신변과 휴대품 검사는 정밀검사로 바뀌었고, X-RAY 등 첨단장비가 도입됐다. 현재는 테러 위협까지 더해져 세관은 폭발물 탐지견, 출입문 금속탐지기 등 최신 과학장비 등을 강화해 밀수를 철저하게 단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