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영문학 교수 존 닐(John D. Niles)은 『호모 나랜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호모 나랜스, 즉 ‘인간은 이야기하려는 본능이 있고,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이해한다.’는 특성으로 인간을 정의했다. 호모 나랜스는 정보에 대한 사실적 전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뜻하는데, 요즘처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다양한 UCC, 동영상 등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의 분석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
라디오 방송의 탄생 역시 인간의 이러한 욕구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라디오’는 기존의 정보전달 방식과 다른 형태인 ‘사람의 말’ 즉, ‘목소리’를 통해 전달한다. 사람의 목소리로 정보를 전달받다 보니 쌍방향 대화방식은 아니어도 소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1927년 2월 16일 사단법인 경성방송국(JODK, 출력 1kW, 주파수 690kHz)에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라디오 방송은 일본인들과 일부 한국 부유층들의 전유물이었다. 라디오 가격이 쌀 50가마니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후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같은 해 9월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때부터 국영방송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뉴스와 오락이 있는 라디오를 통해 일제 강점기의 아픈 기억을 빨리 털어내려는 듯 사람들은 라디오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와 함께 라디오 방송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때 라디오에선 다양한 퀴즈 프로그램과 어린이 방송을 선보였다. 그 중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던 것은 바로 어린이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서구 열강들에 둘러싸여 여러 위기를 겪었던 조선은 미래를 위한 해답을 ‘소년’에게서 찾았다. 육당 최남선이 잡지『소년』을 창간하면서 소년들을 강인한 육체와 지식습득의 자세를 지닌 존재이자 미래를 이끌어 갈 사람으로 그렸고, 이후 ‘소년’ 서사는 다양한 작품에서 나타났다. ‘똘똘이의 모험’ 역시 그 ‘소년’ 서사 중 하나였다. 1936년 동아일보에서 처음 연재된 소설이 라디오 전파를 타면서 사람들은 똘똘이의 아픔에 울고, 기쁨에 함께 웃으며 내일을 향한 희망을 품었다.
한국 라디오 방송사가 독립 호출부호를 배당받은 것은 1947년이었다. 라디오를 듣다 보면 “OO HL, Mhz OO방송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HL이 바로 한국 라디오의 호출부호다. 그 전까지는 일본 배당의 ‘JO’를 써야 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 6.25전쟁이 터지면서 라디오 방송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옮긴 라디오 방송사들은 미군의 기자재를 사용하게 되고 그와 함께 기술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1954년 12월 15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방송사인 기독교방송(CBS)이 첫 전파를 발사하면서 라디오 방송사들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 착안한 ‘다이얼을 돌려라‘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며 CBS는 국영방송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 비결은 예산 부족으로 LP판이 한정적이었던 KBS와는 달리 미국 선교단체의 원조를 받는 CBS는 음악자료가 방대하다는 점이었다.
그러자 KBS는 다른 분야로 승부수를 띄우는데, 바로 라디오 주말연속극이었다. 1956년 조남사 작가의 극본 ‘청실홍실’이 방송되자 KBS는 실로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이 인기에 힘입어 KBS는 일일연속극까지 편성하는데, 1957년 ‘산너머 바다건너’를 선보이며 장민호, 이혜경, 이춘사 씨 등의 성우를 스타 반열에 올려놨고, 훗날 영화배우로 이름난 성우들도 많이 배출했다.
남산 스튜디오 시대가 열리면서 라디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청취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형식의 방송포맷을 만들어갔다. ‘누가누가 잘하나’, ‘스타 탄생’ 등 청취자가 직접 참여하는 공개 방송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음악방송과 음악 DJ들이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TV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라디오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라디오 방송의 골든아워가 변해가고 있다. (중략) TV가 등장하기 전에는 가장 청취율이 낮던 시간이 TV의 보급에 따라 가장 청취율이 높은 시간으로 변해가고 있다.”(「서서히 바뀌는 라디오 골든아워」, 경향신문 1974년 9월 16일자 기사)
사람들 사이에선 ‘라디오’란 매체가 사라질 것이란 성급한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그 결론에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자동차였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자가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라디오는 새 생명을 얻는다. 늘어나는 자동차 수에 비례해 라디오는 더욱 많은 청취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서울에서만 하루 3백여 대의 자동차가 새로 거리에 등장하고, 1천 3백여 명이 운전면허를 따는 '자동차 홍수의 시대'를 맞아 교통정보는 이제 어떤 형태의 라디오 프로그램도 빼놓을 수 없는 메뉴가 됐다.”(「교통시대 운전자의 귀를 잡아라」, 한겨레 1997년 3월 11일자 기사)
이전에 누렸던 드라마와 공개방송의 인기는 TV에 빼앗겼지만, 실시간 교통정보, 도로상황, 속보 등을 가장 빠르게 들려주고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 사는 이야기를 신속하게, 그리고 허물없이 주고받는 라디오의 특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거기다 라디오는 귀로만 듣는 특성을 버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매체로 변화하고 있고, 라디오 수신기 역시 이제는 스마트폰 어플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살아남은 매체답게 지금도 라디오는 진화하고 있다. 과연 많은 방송학자가 예언한 대로 라디오 방송이 우리 생활 속에서 사라지는 날이 올까? 라디오 탄생 120년째인 지금, 라디오의 진화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