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우리나라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장면이지만 외국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대사가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 한다거나, 부모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노발대발한 부모가 호통을 치며 말한다.
“당장 호적을 파서 나가!!”
사실 일상생활에서도 오가고 있지만 이 대사는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제 호적에 올리는 것도, 호적에서 파내는 것도 실제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호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1958년 민법 제정 이후 여성계의 폐지 요구를 줄곧 받아왔던 호주제가 폐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1999년 5월 여성단체연합이 호주제폐지운동본부를 발족하면서 본격적으로 호주제 폐지 운동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5일에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호주제 폐지 권고 결의도 발표되었다. 2000년 9월 22일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가 발족, 호주제 폐지 국회 청원이 시작되었다. 2003년 9월 4일 법무부는 호주제 폐지를 내용으로 한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였고, 같은 해 11월 20일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첫 공개변론이 시작되었다. 헌법재판소는 5차에 걸친 공개변론 끝에, 2005년 2월 3일 최종적으로 호주제가 규정된 민법 781조 1항 및 778조의 헌법불합치를 결정하였다. 마침내 호주제가 폐지된 것이다.
「호주제」란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구성원들의 출생·혼인·사망 등의 신분변동을 기록하는 것으로, 민법 제4편(친족편)에 의한 제도였다. 즉, 우리나라의 호주제는 부계혈통을 바탕으로 하여 호주를 기준으로 '가(家)' 단위로 호적(戶籍)이 편제되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도입되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1947년 '가(家)' 제도를 폐지하는 가족법 개혁이 이뤄져 호적에 기록하는 가족범위를 부부와 그들의 미혼자녀로 축소하고(3세대 호적금지) 호주제를 없앴다. 외국의 경우에도 각 개인별로 자신의 신분증명 문서를 갖는 1인1적 제도를 가장 많이 선택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 남아있던 호주제는 그동안 ‘남성 우선적인 호주승계순위, 호적편제, 성씨제도’와 같은 핵심적인 여성차별조항이 있어 문제가 되어왔다. 또한 부계혈통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족 내 주종관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아울러 이혼·재혼가구 등의 증가에 따른 현대사회의 다양한 가족형태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에 따라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 개정이 추진되었다. 1977년, 1990년, 2002년에 부분적 개정이 이루어졌고, 2005년에 이르러 마침내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여성은 기존의 부계혈통, 가부장제 등으로 남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었다. 어머니는 여아를 출산하면 죄인이 되었고, 여아는 오빠나 남동생들과 성차별을 받아왔으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문을 계승할 자격도 얻을 수 없었다. 호주승계순위가 아들-딸(미혼)-처-어머니-며느리 순으로 되어 있어, 가족 속에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모순을 법으로 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어머니보다, 손자가 할머니보다 호주승계순위가 앞서는 가족질서와도 부합되는 것이 호주제였다. 그동안 여성 보다 남성이 더 선호 받고 대접받아온 일면에는 부성주의 원칙에 의한 호주제의 영향이 컸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또한 호주제는 여성뿐 아니라 한부모 가정의 입장에서도 여러 불합리한 조항이 있었다. 한부모들은 이혼 후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기에 앞서 부모님의 호적에 자신이 이혼한 것으로 인해 빨간 줄이 그어졌다는 부담으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자녀를 유학 보내려면 주소도 모르는 아버지의 호적을 첨부하느라 불편을 겪어야만 했고, 호적에 본인은 자(子)의 생모(生母), 남편의 새 배우자는 자의 모(母)로 기재되는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호주제는 또한 자녀의 정체성에도 혼란을 주었다. 한부모 가정의 자녀들 중에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본적이 없거나 아버지의 자식인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자녀들도 있다. 또한 자녀양육비를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어머니나 외가에 의해 양육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아버지 또는 친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해온 자녀에게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게 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왔다.
한부모가 재혼을 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새 아버지와 자녀들의 성이 달라 재혼 사실이 드러나고, 의료 혜택 등 실질적인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한 지붕 세 가족이었던 셈이다. 호주제의 폐지로 한부모 가정은 우선 달라지는 ‘가족관계등록제도’에 따라 호적에 빨간 줄을 그어 부모님에게 불효하는 일이 없게 되었고, 또한 자녀는 어머니의 성과 본을 갖게 되어 자신의 정체감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재혼을 하면 ‘친양자 입양제도’를 통해 합법적인 부자지간이 될 수도 있게 되었다.
앞서 예를 든 TV 드라마 장면처럼 10년 전인 2005년에 이미 폐지된 호주제의 그늘에서 우리사회는 왜 아직 못 벗어나고 있을까?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본적(本籍)’이다. 정부는 호주제를 폐지하면서 2008년부터 본적 대신 ‘등록기준지’를 사용하게 했다. 호주제가 폐지됨에 따라 호적제도를 대체할 새로운 가족관계 등록제도가 신설된 것이다.
그런데 등록기준지와 본적은 엄연히 다르다. 본적은 호주의 호적(戶籍)이 있는 장소다.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나 출신지를 식별하는 기준이다. 반면 등록기준지는 법적·행정적 편의를 위해 등록하는 장소다. 호적과 달리 변경도 자유롭다. 그러나 아직도 취업·진학 등의 실생활에서는 등록기준지보다 본적이 더 통용되는 실정이다. 심지어 경찰청이나 국방부 등 일부 공공기관에서도 행정서류에 본적을 기입하게 한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는 없어졌다고 배웠지만, 합격한 뒤 인사기록카드에는 본적을 적도록 하는 현상이 아직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제도가 바뀌었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오랜 시간 우리 생활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호주제는 폐지된 지 10년이 지났어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인습으로서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