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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전화가 귀하던 시절 한 동네에 한두 대가 겨우 있던 전화기는 온 동네 주민들의 귀한 물건이었다. 전화를 걸 때는 전화 가입자가 교환원에게 “몇 번 부탁합니다” 하고 얼마간 기다려야 상대방과 연결됐다. 장거리 전화의 경우 전신전화국에 가서 전화신청 접수를 하고 기다리면 “○○씨 몇 번 부스로 가세요” 하는 방송이 나온다. 서너 개의 부스 중에 지정한 번호의 부스에서 수화기를 들면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접수 후 통화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20분, 30분……. 때로는 더 오래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연결된 전화의 통화품질이 좋지 않으면 “여보세요. 여보세요. 잘 안 들려요”만 몇 번 하다가 전화를 끊어야 했다. 공중전화 앞에서도 동전을 호주머니에 넣고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겨우 전화 한통을 걸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기다림을 가르쳐주던 문명의 이기(利器)이며 느림의 기계가 전화였다.

국내전기통신요금제정(안)(장거리자동전화 통화요금)
국내전기통신요금제정(안)(장거리자동전화 통화요금)(1971)

세 번 절하고 나서 받던 초기 임금님 전화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개통된 날은 1896년 10월 2일이었다. 처음에는 전화를 ‘텔레폰’이란 영어를 음역해서 ‘덕률풍(德’律風)‘이라고 부르거나 말 전하는 기계라는 뜻으로 ‘전어기(傳語器)’라고도 불렀다. 당시 궁내부(宮內部) 주관으로 궁중에서 각 아문(衙門)과 연락을 위해 덕수궁에 전화시설을 마련한 뒤 인천에 있는 감리소(監理所)까지 전화를 개통하면서 우리의 전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주로 임금과 신하가 통화를 할 일이 많았는데, 임금님이 전화를 하면 신하들은 절을 세 번 한 다음 무릎을 꿇고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1902년 3월 20일 최초로 민간 전화가 개통되고, 곧이어 초기 공중전화라 할 수 있는 ‘전화소’가 서울 마포, 도동, 시흥, 경교와 인천 등지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통화료는 선불로 5분에 50전, 2000년대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약 2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일찍 끊어도 환불은 되지 않았으니, 무척 비싼 통신비였다. 1905년 ‘한일통신협정’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우리의 통신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이후 8.15광복 때까지 40년간 되찾을 수 없었다. 1945년 광복이 된 그해 12월 한·미간 최초의 국제직통무선전화가 개통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전신·전화 시설은 거의 파괴되어 버렸다. 전쟁 후에는 훼손된 통신시설을 복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1950년대에는 통신망을 복구하고 근대식 통신시설로 바꾸기 위해 외국 기술자를 불러오기도 하였다.

1가구 1전화에서 ‘1인 1전화’로

1960년대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통신사업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1961년 12월 30일 「전기통신법」을 제정하고 1962년부터 통신사업개발 5개년 계획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였다. 1963년 자동전화 도수제 실시 등 통신 산업의 이용 제도와 서비스 향상으로 전화가입자 숫자가 1969년 7월 50만 명을 넘어섰다. 경제 성장과 소득 증대에 따라 전화 수요가 급증하면서 도시 및 농어촌의 전화회선 증설, 국제간 장거리전화 증설, 시외통화 자동화를 서둘러야했다. 1971년 3월 31일 마침내 서울에서 부산, 부산에서 서울로 전화를 직접 걸어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장거리자동전화(DDD : Direct Distance Dialling)는 전화 이용자가 교환원의 도움 없이 즉시 시외 가입자에게 전화를 거는 방식이었다. 기존의 시외 전화는 전화 교환원이 발신자와 수신자를 수동으로 연결해 주어서 속도가 많이 뒤떨어졌고, 전화가입자도 늘어나면서 이에 대한 불편이 많았다. 장거리 자동전화개통으로 인해 서울과 부산은 하나의 통신망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대한뉴스 제1632호] 전국전화 자동화 시대
[대한뉴스 제1632호] 전국전화 자동화 시대(1985)

1981년까지 총 4차에 걸쳐 계속된 통신사업개발 5개년 계획으로 농어촌, 도서 지역까지 통신 서비스를 확충했고, 국제통신 2원화와 위성통신기지국 설치 등 통신산업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1980년대에는 무선호출 서비스, 이동통신 서비스로 무선통신이 시작됐다. 1984년 한국이동통신이 설립되었으며 농촌까지도 전화 자동화와 통화권 광역화가 이뤄졌고, 1987년 1000만 전화 회선이 공급되면서 우리나라는 1가구 1전화의 통신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1993년 2,000만 회선을 돌파하며 세계 제8위의 통신시설 보유국이 되면서 1가구 1전화시대에서 ‘1인 1전화’의 개인통신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편, 1994년 12월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개편되어 국가 정보기반 구축과 산업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21세기 정보화시대에 대비한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에 주력해 전기통신에 이어 정보통신이 통신 산업의 중핵으로 자리 잡았다.

백두진 국무총리 서울-부산간 직통전화 가동 시험 썸네일 이미지
백두진 국무총리 서울-부산간 직통전화
가동 시험(1971)
전두환 대통령 전국전화자동화 완성 시험모습 썸네일 이미지
전두환 대통령 전국전화자동화
완성 시험모습(1987)
전국전화자동화 완성 기념식 썸네일 이미지
전국전화자동화 완성 기념식(1987)

정보통신의 바탕은 정(情)과 믿음(信)!

1990년대에는 인터넷 서비스 보급과 함께 정보화 시대를 맞이했다. 1994년 한국통신이 KORNET 서비스를 개시하며 최초로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 후, 1998년 두루넷이, 1999년 한국통신과 하나로텔레콤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삐삐'를 시작으로 무선 이동통신의 대중화가 열렸다. 1995년 8월 국내 최초의 통신·방송 복합위성인 무궁화호가 발사되어 한국 통신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2000년대 후반에는 스마트폰이 등장했다.

현재 미래창조과학부가 발표한 '무선통신 가입자 현황'에 따르면, 2015년 11월 기준으로 국내 무선통신 가입자는 총 5,900만여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이제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중 스마트폰 사용자는 4,300만 명, LTE 가입자는 4,100만 명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스마트 시대’를 살고 있으며, 속도와 데이터량에서 초연결시대라 일컫는 5G 시대를 앞두고 있다.

정보통신(情報通信)이란 한자에는 ‘정(情)’과 ‘믿음(信)’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간다. 1876년 벨에 의해 발명된 이후 140년 동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전화. 그러나 아무리 똑똑한 스마트폰이라 해도 사람들 사이에 따뜻한 정과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할 책임은 기계가 아닌 인간의 몫이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http://www.tta.or.kr)
  • 두산백과사전(http://www.doopedia.co.kr)
  • 산업통상자원부(http://www.motie.go.kr)
  • 『한국전기통신100년사』, 체신부, 1985.
  • 『한국의 과학문화와 시민사회』, 한국학술정보, 2010.
  • 『기록으로 본 한국의 정보통신 역사』, 진한M&B, 2012.
  • 『디지털시대의 정보이야기』, 홍릉과학출판사, 2015.
  • 『통하다 톡하다』, 라이크컴퍼니, 2015.
  • 경향신문, 「千里 “여보세요” 한 맥박권(脈搏圈)에」, 1971.3.30.
  • 뉴시스, 「장거리 자동전화(DDD) 시대 개막 43년」, 2014.3.25.
  • IT동아, 「전보와 교환 전화에서 4G LTE 스마트 시대로」, 201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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