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번지, 서울시청 맞은편에 위치한 사적 제124호 덕수궁은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는데, 1593년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돌아온 선조가 불타버린 창덕궁 대신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 1608년 선조는 창덕궁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승하했고, 이곳에 거처하던 광해군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내려 궁궐로 승격시켰다.
한동안 잊혀진 궁궐이었던 경운궁은, 고종이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 친러 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들어오면서 사실상 새 궁전이 됐다. 이곳에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경운궁은 본격적인 궁궐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1900년 담장공사가 완공되었고, 1902년 중화전을 시작으로 관명전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다. 1904년 대규모 화재로 소실된 중화전을 1906년 중건하고, 이때 대안문도 수리하여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후 왕위에 오른 순종은 1908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홀로 남게 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올렸는데, 이것이 지금의 ‘덕수궁’이라는 궁궐명이 되었다.
2011년 덕수궁이 일제 침략의 잔재이므로 명칭을 ‘경운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문화재청 주최 공청회를 거친 끝에 명칭변경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왕이 살았던 궁궐 어디나 숨은 사연이 있겠지만, 덕수궁(德壽宮)은 조선왕조 말기 격랑의 역사가 꿈틀대던 현장으로, 궁내의 각 건물들은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남아있다.
대한문을 통과하고 금천교를 지나면 중화문과 중화전을 만나게 된다.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 입장권에 사진이 실려 있는 건물로 이곳에서 왕의 즉위식, 조례, 외국 사신 접견 등 주요한 국가적 의식을 행한 정전(正殿)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전은 ‘즉조전’이었는데, 1902년에 창덕궁의 인정전을 본 따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인 중화전을 새로 지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05년 중건되면서 원래 2층 건물이 단층 건물로 바뀌었다.
중화전 답도(계단 한가운데에 있는 장식)에 새겨진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용 두 마리, 중화전 내부 천정의 금색 쌍룡 문양과 황색으로 칠한 창호 등에서 황제의 위상이 깃들도록 만든 흔적들이 남아있다. 막힌 벽 없이 사방으로 탁 트인 내부에는 고종이 쓰던 어좌가 있으며, 그 뒤로 ‘일월오악도’가 마치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1985년 1월 8일 중화전의 정문이자, 덕수궁의 중문에 해당하는 중화문(中和門)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다.
중화전 왼편 분수 옆으로는 한국 최초 근대식 석조건물인 석조전과 석조전 별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석조전은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건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고 1900년 착공해 1910년에 준공하였다. 정면에 둥근 기둥이 늘어선 르네상스식의 화려한 3층 석조건물로 고종의 처소와 사무공간의 용도로 건립했지만, 주로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이 기거했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집무실과 알현실로만 사용하고 침소로는 함녕전을 사용했다.
광복 후 1946년에는 이곳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석조전으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2014년 10월 13일 복원하여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방했으며, 2017년 3월, 전시 공간을 더 넓히고, 전시 유물도 100여점을 늘려 '대한제국실'을 재개관했다. 석조전 별관은 일제강점기에 왕가의 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덕수궁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중명전은 본래 ‘수옥헌(漱玉軒)’이라는 이름의 단층 건물로 황실도서관으로 사용하다가 1904년 화재로 중화전이 소실되자 고종이 3년 동안 머물렀는데, 1905년 중건 때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개칭하고, 편전으로 삼아 외국 사절을 접견하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여기에서 체결되었다. 을사조약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게 된 불평등조약으로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 한일협약’, ‘을사5조약’, ‘을사늑약’(乙巳勒約, 늑약은 억눌러서 이루어진 조약을 말함)이라고도 한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 “을사조약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맺어졌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자 고종이 이들에게 친서를 전달했던 장소도 이곳 중명전이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 정부는 한국 측이 을사보호조약을 위반했다며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일제강점기 이후 중명전은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으로 사용되다가, 1960년대부터 40년간 민간의 소유로 된 것을 2005년 정부가 매입, 복원 공사를 거쳐 2010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2017년 7월 1일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새 단장을 하고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보물 제820호로 지정된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고종의 침전이었다. 1897년에 지어졌으나 1904년 4월 14일 온돌 교체공사 도중 발생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의 주요 전각이 모두 전소되었다. 함녕전은 1906년 중건되었는데,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된 고종은 줄곧 이곳에서 거처하다 1919년 1월 21일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 승하하였다.
‘덕수궁 돌담길’은 서울의 대표적인 산책로로 ‘이 길을 끝까지 걸은 연인은 헤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돌담을 따라 덕수궁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동안 전체 1,100m의 길 가운데 170m가 영국대사관에 막혀 있었는데, 2017년 8월의 복원·개방에서도 완전히 연결하는 데는 실패했다. 1950년대 영국대사관 측이 점용 허가를 받아 통제하였던 100m 구간은 이번에 개방되지만, 나머지 70m 구간은 대사관의 직원 숙소와 업무 빌딩이 들어서 있어 보안을 이유로 완전복원되지 못한 것이다. 영국대사관이 지금의 터를 사들인 건 1883년. 덕수궁 돌담길을 완전히 연결하기 위한 숙제는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