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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으로, 우리나라 천주교의 상징이자 구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892년(고종 29)에 착공하여 1898년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로 쌓은 교회이며,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지어졌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8호에 지정되었다.

  • 명동성당 전경(1975, CET0059179(1-1)) 참고 이미지
  • 명동성당 전경(1975)
  • 크리스마스이브 명동성당(1981, DET0037360(2-1)) 참고 이미지
  • 크리스마스이브 명동성당(1981)

백년 박해 끝에 명동성당이 건축되기까지

명동대성당이 명동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가 된 역관(譯官) 김범우와 연관이 있다. 중인계급의 역관이었던 그는 학문을 좋아하여 이벽과 친하게 지냈다. 이벽이 1784년 처음으로 천주교를 설교할 때 그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영세명은 토마스이다. 그는 지금의 명동 근처인 명례방(明禮坊)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열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였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만으로 구성된 신앙공동체이자 천주교회가 창설된 것이다.

이 집회는 정조(正祖, 1776-1800) 9년인 1785년 3월 추조(형조)에 발각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 권일신 부자 등 양반과 중인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의 관리가 도박으로 의심하고 수색한 끝에 예수 화상(畵像)과 천주교 서적들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치게 되었다. 함께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양반의 자제들이었기에 방면되었고 집회 장소 제공자인데다가 중인이었던 김범우만 유배형을 받게 된다. 그는 혹독한 매질을 받고 밀양 단장으로 유배되어 2년 동안 고생하다가 1787년 9월 14일 사망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형조에서는 서학(西學)을 금하는 효유문(曉諭文)을 전국에 돌렸는데, 이것은 천주교를 공공연하게 공격하고 금한 최초의 공문서가 되었다. 이후 백 년 동안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박해를 받게 된다. 순조(純祖, 1800-1834) 즉위 후 정순왕후(貞純王后, 영조의 계비)에 의한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부터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1882년 「한미수호 조약」이 체결되자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Marie-Jean-Gustave Blanc, 1844-1890)가 김범우의 집을 성당 터로 매입하였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 우선 종현성당(鐘峴聖堂)을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1887년 5월에 나머지 대지를 구입하였고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정초식을 가졌다.

설계와 공사 감독은 신부 코스트(E. J. G. Coste)가 직접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건축의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벽돌공, 미장이, 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다가 일을 시켰고 재정난과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896년 설계·감독을 맡았던 코스트 신부가 사망하고 푸아넬(Victor Louis Poisnel, 1855~1925) 신부가 뒤를 이어 내부공사를 속행하여 1898년 5월 29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 양식 건물로서 ‘뾰죽집’이라는 이름으로 장안의 명물이 되어 많은 구경꾼이 몰려왔다. 1900년 9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들의 유해를 용산신학교에서 옮겨와 지하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도 삼성산에서 옮겨와 1901년에 명동성당에 안장하였다.

  • 명동성당 크리스마스 축하 미사 광경(1960, CET0061992(1-1)) 참고 이미지
  • 명동성당 크리스마스 축하 미사 광경(1960)
  • 명동성당 전경(1972, CET0052565(1-1)) 참고 이미지
  • 명동성당 전경(1972)

우리나라 민주화에 기여한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신앙 자유의 상징으로서, 일제와 6.25전쟁의 수난을 거쳐 독재정권에 맞서 민족의 양심과 지성을 지켜온 민주화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가톨릭교회와 국가 사이의 갈등은 유신독재시기인 1974년부터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4년은 ‘지학순(池學淳, 1921년~1993년) 주교 사건’과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성이 있었던 시점이었다. ‘지학순 주교 사건’은 1974년 7월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된 사건이다.

명동대성당이 주축이 되어 벌였던 민주화․인권운동은 무척 다양한 영역에 걸쳐 벌어졌는데, 지학순 주교 사건을 계기로 1978년의 ‘동일방직 사건’을 비롯한 노동운동, 1979년의 ‘오원춘 사건’을 비롯한 농민운동, 1978년의 ‘7․6 사건’을 비롯한 교권수호활동,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결성과 1976년의 ‘명동 3․1 사건’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19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언론자유화운동, 유신체제를 반국가적이고 부도덕한 것으로 비판했던 정의구현사제단의 여러 차례에 걸친 입장 표명, 양심수들을 옹호하는 인권운동을 벌였다.

  • 교황 요한바오로2세 명동성당 미사집전(1984, DET0039832(1-1)) 참고 이미지
  • 교황 요한바오로2세 명동성당 미사집전(1984)
  • 고 박종철 명동성당 추모식(1987, DET0042379(6-1)) 참고 이미지
  • 고 박종철 명동성당 추모식(1987)

1980년대 우리나라 민주화에 있어서 명동성당의 역할은 더욱 증폭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지자 김수환 추기경은 신자들에게 '광주항쟁'에 대해 특별기도를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하고 시국관련 담화문을 발표하였으며 명동대성당에서는 철야기도회가 열렸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피의자들을 피신시킨 이유로 최기식(崔基植) 신부가 구속되자 김수환(金壽煥, 1922-2009) 추기경은 1982년 4월 7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성유축성미사 중 강론을 통해, “최 신부의 행동은 가톨릭 사제로서 정당하고 합당한 행동”이라고 인정하였다.

1987년 5월 18일 김수환 추기경 집전으로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5․18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미사‘가 끝난 후,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당시 명동성당에서는 상계동 철거민들이 명동성당에서 집단 천막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6월 항쟁 도중 학생과 시민시위대의 ’해방구‘ 역할을 하였다.

(집필자 : 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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