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8일 오후 1시가 조금 지나가자 종근당빌딩 앞 아현고가도로 입구엔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음날이면 철거가 시작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아현고가도로 위를 마지막으로 걸으며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1966년 급성장하는 서울의 시장이 된 김현옥은 ‘도시는 선이다’라는 구호 아래 고가도로의 건설을 추진했다. 그는 재임하자마자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벌여 서울의 풍경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는데, 1967년부터 추진된 고가도로 건설계획도 그 중에 하나였다. 1960년대 들어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교통문제도 심각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김현옥 시장은 서울의 도시공간을 입체화하여 자동차가 마음 놓고 시속 6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고가도로의 건설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고가도로 건설계획에 대해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극심하게 반대했다. 전문가들은 고가도로는 대중·대량 교통수단이 아닌 자동차 전용도로에 불과하여 교통난 완화수단으로 최선의 방안이 아니며, 고가도로의 기능상으로도 도심관통은 불합리하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또한, 일부 전문가들은 지하철 도입이 우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 시장은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건설을 강행하였으며, 1968년 9월 19일 우리나라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를 개통하기에 이른다.
마포구 아현동에서 중구 중림동을 잇는 940m의 아현고가도로가 개통된 후, 1969년 3월 22일 길이 870m의 삼일고가도로가 개통되었다. 1967년 10월 14일 착공한 삼일고가도로는 1967년 8월 15일 착공한 청계고가도로의 일부 구간에 해당하는데, 당시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삼일빌딩이 있는 삼일로 위를 지나가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1970년 8월 15일 서울역고가도로가, 1971년 8월 15일 총길이 5,650m의 청계고가도로가 속속 개통하면서 서울시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착공되어 개통되기 시작한 서울의 고가도로는 이후 서울 시내 곳곳에 계속 건설되면서 점차 부산 등 전국 각지에도 건설되었다. 속도와 효율, 도심을 가로지르는 논스톱의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고가도로는 발전하는 서울의 모습을 상징하며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시민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30~40년을 사용한 고가도로들은 점차 기능의 효율성보다 문제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도시 미관을 해칠 정도로 노후화되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으며, 병목현상으로 인한 교통체증은 애초의 고가도로의 목적을 무색하게 했다. 더불어 고가도로 주변의 슬럼화도 철거 이유가 됐다. 또한 서울을 ‘걷기 좋은 도시’로 만들기 위한 서울시의 변화된 정책으로 고가도로는 하나 둘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1990년대까지 활발하게 건설되던 고가도로는 2002년 동대문구 전농동 떡전고가도로를 시작으로, 2003년 청계고가도로, 2008년 광희고가도로, 2012년 홍제고가도로, 2013년 혜화고가도로와 서빙고고가도로, 2014년 약수고가도로 등이 차례로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