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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메꿔 땅을 만들다  간척사업

우리나라 국토 면적은 절대면적이 협소하고, 이중 산지가 65%에 달한다. 또한, 평지 면적이 절대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국토의 구성은 우리나라와 같은 농업국가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고, 경작지 확대를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우리나라는 반세기 동안 세계에서 간척이 가장 활발한 나라 중 하나였다. 간척사업은 8.15 광복 이후에는 소규모로 시행되다가 1960년대 국가경제개발의 일환으로 추진된 동진강 간척사업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다. 1980년대에는 간척사업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산강, 금강, 영암 방조제 공사를 완료하였고, 1990년대에 시화호, 새만금 종합개발사업을 시행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대한뉴스 제409호] 동진강 간척공사 기공(1963, CEN0000327(7-1))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제409호] 동진강 간척공사 기공(1963)

이러한 간척사업은 세계시장개방에 따른 농업 경쟁력 강화와 식량안보 차원에서 집단우량농지의 확보가 절실해지고, 도시화·산업화에 따른 농지전용이 잦아지면서 현격한 농지 감소현상이 예상됨에 따른 국가차원의 대처방안이었다.

간척지, 해상 방어의 목적에서 ‘이권 다툼’의 대상으로

우리나라 간척의 기원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후 해상 방어를 목적으로 연안제방을 구축한 것이 시초였다. 이후 항몽(抗蒙)기간에 식량 조달을 위하여 갈대섬에 제방을 축조하여 농지를 조성하고,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농지조성 목적의 첫 간척이었다. 강화도는 이렇듯 일찍부터 간척사업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라 섬임에도 불구하고 어업보다 농업이 발달하는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갯벌을 ‘해택(海澤)’이라고 불렀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 8년(1426)에 “권근이 평택현의 해택(海澤)을 받아 방죽을 쌓고 밭을 만들고…”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바닷물을 메워서 경작지를 만드는 일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해택은 일반 농지보다 ‘소출이 2배’나 되었고, 이를 둘러싼 재력가들의 이권 다툼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적 농지개량사업의 성격을 갖는 간척사업은 1907년 7월「국유미간지이용법」이 제정된 후 시작되었다. 백성들이 소유한 토지 이외의 들, 황무지, 소택지(沼澤地) 및 간석지(干潟地) 도 국유미간지로 취급되어 농상공부대신의 허가를 받아 대여형태로 간척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농상공부대신은 간척사업이 성공한 경우 그 토지를 불하하고, 지세도 감면해 줄 수 있었다. 과거에는 백성들이 자유롭게 개간하여 소출을 거둘 수 있었는데 이 법이 제정되면서 ‘자유로운 개간’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심지어 일본인에게 닫혀있던 ‘개간권’의 빗장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국권침탈 후 일제는 우리나라를 자신들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수립·추진하였고, 이러한 정책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1920년~1939년 사이에 일본인 주도로 간척사업 및 토지개량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사업은 1923년 3월에 공포된「조선공유수면매립령」에 기반하여 모든 매립·간척사무가 처리되었다.

경제개발의 바람을 타는 대규모 간척사업

광복 이후 혼란기를 거치면서 최초로 시행된 신규 간척사업은 국제연합재건단(UNKRA)의 협력하에 수리조합회가 시행한 강화지구 간척사업이었다. 1960년대에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간척사업도 활성화되었는데, 농업용수개발 등 농업생산기반 확충사업의 일환이었다.

  • 충남서산지방 간척예정지구 군관민합동조사(1961, CET0043674(3-1)) 참고 이미지
  • 충남서산지방 간척예정지구 군관민합동조사(1961)
  • 김해지구간척공사 기공식(1965, CET0033050(1-1)) 참고 이미지
  • 김해지구간척공사 기공식(1965)

이 시기 간척사업은 국토개량, 농업생산기반 확충 및 난민구제사업의 성격으로 추진되었는데, 1962년 공포된「공유수면매립법」은 사업의 목적별로 건설부, 농림부, 보건사회부를 지정함으로써 주관부처의 관여 하에 사업이 시행되도록 하여 간척사업이 본격적으로 행정적 지원을 받도록 하였다. 1970년「농촌근대화촉진법」의 공포 및 농업진흥공사의 설립 등도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간척사업은 대규모 재정투입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경제정책기조가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전환되면서 1960년대 말부터는 위축되었다.

공유수면매립법(안)(1961, BA0085233(3-1)) 참고이미지
공유수면매립법(안)(1961)

1970년 이후 정부는 간척사업을 소규모개발방식에서 대단위 종합개발방식으로 전환하였다. 계화도지구사업, 아산・삽교천지역 간척 등을 포함하는 평택지구개발사업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이러한 대규모 간척사업이 농업목적이 아닌 비농업 목적으로 전환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1980년대 초반 중동지역 건설경기 침체로 인한 국내 경기부양과 유휴인력 및 장비를 활용할 공간이 필요했고, 농지조성보다 복합산업단지 조성의 필요성이 증대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생각하지 못했던 환경문제, 보존이냐 개발이냐

시화지구 간척농경지 조성사업 기본계획 확정(1991, DA0030963(1-1)) 참고이미지
시화지구 간척농경지 조성사업 기본계획 확정(1991)

1973년에 제정·공포된 「산업기지개발촉진법」은 별도의 매립면허를 받지 않아도 간척·매립을 통하여 산업기지 개발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 결과 간척지 개발사업은 주변의 사회적 여건 및 자연 생태계를 대규모로 훼손하는 환경문제를 야기하였다.

간척·매립사업이 사회적인 환경문제로 크게 대두된 계기는 1994년 시화지구사업으로 조성된 시화호에 산업폐수와 생활하수의 유입이 보도되면서 부터였다. 시화호의 수질오염은 갯벌 및 해양환경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시켰고, 이후 간척개발사업과 환경관리정책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당시 세계 최대규모로 진행 중이던 새만금방조제 공사를 중단시키는 등 사회적 관심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보존이냐 개발이냐’라는 중요한 담론을 만들어냈고, 이 담론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집필자 : 조정미)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https://www.nl.go.kr)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ttp://www.grandculture.net)
  • 《대단위 매립간척실태분석 및 제도개선방안 연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 《한국의 간척》 농어촌진흥공사, 1995.
  • 이혜경, 〈시화호 간척개발사업과 환경관리정책의 변화〉, 《환경법과 정책》9권, 2012.
  • 이승민, 〈새만금 간척사업을 둘러싼 담론변화와 갈등구조 분석〉, 《환경사회학연구 ECO》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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