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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대 철학과를 다니는 병태와 영철은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참가비로 거금 2천원을 냈다. 첫 미팅이니만큼 목욕탕에서 목욕재계하고 양복까지 차려입고 미팅 장소로 간다. 신나게 시내를 걸어가던 병태와 영철은 그만 장발단속을 하는 경찰을 만난다. 빠르게 한국은행 앞 사거리를 지나 을지로 입구로 도망을 친다. 경찰을 따돌렸다고 생각한 후 잠시 한숨을 돌리고 육교를 건너다 경찰과 마주친다. 결국 파출소로 붙잡혀온 병태와 영철은 눈치를 살피다 파출소에서 도망을 친다. 이상은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도입부분이다.

1975년 5월에 개봉된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신체제로 경직된 사회상, 젊은이들의 방황과 우울함을 그린 1970년대 청년영화의 대표작이다. 장발 단속, 막걸리마시기 대회, 청바지와 포크송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를 통해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풀어갔다. 영화 속에 나오는 장발단속의 모습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사생활 침해, 인권침해이지만 그때에는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만큼 강력한 통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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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1042호] 장발족 단속(1975)

1971년 10월 1일자 신문 사회면에는 ‘가위질 스타트’라는 제목 하에 퇴폐풍조 추방 운동의 하나로 장발족을 단속해 1,164명의 머리를 강제로 깎은 뒤 훈방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장발족 단속 기준은 ‘머리카락이 귀를 덮고 뒤 머리카락이 여자의 단발머리보다 길어 불쾌감을 주는 경우’로 되어 있었다. 다만 ’40세 이상의 예술인들이 인습에 따라 기르는 머리카락은 제외한다’고 했다.

자유로운 히피문화에서 통제와 억압까지

1960~70년대 미국은 베트남전쟁 발발,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마틴 루터 킹 암살 등을 겪으며 격동의 시기였다. 당시 청년층들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으로 실의에 빠졌고, 기존의 사회 질서를 부정하고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추구했으며 도덕보다는 자연스러운 감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히피문화’이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발원한 히피문화는 자유분방한 의상과 헤어스타일, 마리화나나 LSD 마약, 집단 난교와 공동생활 등이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또한 히피문화는 틀에 박힌 가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의미에 따라 개성을 표현하고자 했고, 기성사회의 성적 억압과 관습적 도덕을 해체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다.

미국의 팝음악과 함께 들어온 히피문화는 우리나라에서 청바지와 장발 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청바지는 미국의 히피들이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입었던 옷이다. 우리나라 청년들은 장발에 ‘빽바지’라 부르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통기타를 메는 것으로 청년문화를 표현하며 기성세대에 반발하였다. 복장이나 머리 길이에서만이라도 자유를 만끽하고픈 젊은 세대들의 저항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유독 금기와 통제가 많았던 시기였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정부는 이러한 청년들의 문화를 허용하지 않았다.

  • 장발족 단속1
  • 장발족 단속1(1975)
  • 장발족 단속2
  • 장발족 단속2(1975)

장발은 퇴폐문화다.

정부에서는 방송사에 지침을 내려 저속한 외래 풍조를 무분별하게 방송하지 못하게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저속한 외래 풍조는 주로 히피문화를 대표하는 장발을 의미했다. 이때부터 연예인들은 멋내기를 포기하고 자진해서 머리를 깎았고 방송 전반에서 불기 시작한 이러한 바람은 사회에도 불어 경찰관이 가위나 바리깡을 들고 단속을 다녔다. ‘너는 왜 귀가 완전히 나오지 않았어’, ‘왜 뒷머리가 와이셔츠 깃에 닿는거지?’ 등의 이유로 장발을 한 사람들은 마치 범법자들처럼 바닥에 꿇어 앉혀 머리카락이 잘렸다. 심지어 방송 외화에 외국인 장발 출연자가 나오는 장면은 편집 삭제해야만 했고, 어른들의 장발단속은 초등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이 시기 초등학교 학생들은 스포츠머리처럼 짧게 깎는 것이 유행이었다.

장발단속 계획보고 장발단속 계획보고 장발단속 계획보고
장발단속 계획보고(1976)

유신체제에서 히피는 체제에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장발단속은 더 강화되었다. 단속의 명목은 장발이 퇴폐라는 것이었으며 1973년 3월에는 「경범죄 처벌법」이 발효되면서 장발단속은 법제화되었다. 「경범죄처벌법」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저해하거나 사회불안을 조성할 우려가 있는 사실을 왜곡·날조 유포한 자’, ‘은밀한 장소에서 무도교습행위를 한 자’, ‘거리에 침을 뱉거나 술주정을 부린 사람’ 등을 단속 대상으로 추가하였다. 눈여겨 볼 대목은 ‘성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장발을 한 남자, 저속한 옷차림을 하거나 장식물을 달고 다니는 자’가 추가되어 장발단속이 합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장발단속은 ‘국민의 주체의식을 확립하여 건전한 사회기풍을 정착’하기 위해서라는 취지하에 지속적이고 강력하게 실시되었다.

1973년에는 12,000여 건이 단속되었고 1974년 6월 장발족 무기한 단속에 나선 서울시경은 일주일 동안 10,103명을 단속했다. 이들 가운데 9,841명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았고 머리 깎기를 거부한 262명을 즉결심판에 넘겼다. 지속적으로 강력한 단속을 했음에도 장발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1976년에는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대적인 장발 일제 추방령을 내려 장발이 근절될 때까지 무기한 단속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장발단속은 범국민운동으로 추진되어 공무원뿐 아니라 학교, 단체, 기업체, 공장 등 전 조직을 통하여 추진되었다. 장발족 단속은 외국인에게도 해당됐다. 외국인도 머리카락이 길면 공항이나 항구에서 입국이 거부되거나 그 자리에서 잘라야 입국이 허락되었다. 홍콩의 액션배우 성룡은 1970년대 우리나라를 찾았다가 장발단속에 걸렸던 일화를 공개한 적도 있다.

장발단속은 1980년 ‘장발단속이 청소년들의 자율정신을 저해하는 부작용을 낳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내무부에서 단속을 중지시켰으며, 1988년 「경범죄처벌법」을 개정하면서 장발에 대한 단속 규정도 삭제하였다. 젊은이들의 머리 모양을 법으로 통제하려는 정부의 조치는 경직된 사회를 살았던 우리들의 씁쓸한 모습 중 일부였다.

(집필자 : 황은주)

참고자료

  •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 세계일보, 「장발·미니스커트 단속 '1970년대' 진풍경」, 2013.3.18.
  • 서울신문, 「장발족 단속」, 2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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