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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과 안타까움의 쌍곡선 연탄

이제는 사라져버린 풍경이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동네 골목에 연탄을 가득 실은 리어커가 집집마다 연탄을 나르는 모습이 익숙한 시절이 있었다. 서민들에게 창고에 가득 쌓인 연탄은 보기만 해도 뜨끈뜨끈한 아랫목이 떠오르는, 흐뭇하고 든든해지는 겨울나기의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온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검은 사자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다.

겨울을 맞이하는 시민들 참고 이미지
겨울을 맞이하는 시민들(1957)
올 겨울 연료사정 참고 이미지
올 겨울 연료사정(1967)

연탄의 보급

우리나라에서 석탄이 채굴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한제국기 프랑스 자본과 기술을 이용하여 평양지역의 무연탄을 채굴하면서부터이다. 근대화와 산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동력으로서 석탄의 개발과 활용은 대한제국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사업이었다. 평양의 무연탄은 질이 매우 좋아 일본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생산과 이용처를 철저히 통제하며 수탈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 정부는 연료문제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다가 1953년 채굴된 무연탄을 생활연료로 활용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연탄은 가정용 난방연료로 시중에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1955년 생산된 ‘19공탄’이 주를 이루었고 지역에 따라 구멍의 숫자가 다른 연탄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연탄은 표준화되지 않아 정해진 규정은 없었지만, 생산업자들은 대부분 규격을 맞추어서 생산하였고, 1970년대 이전까지 생산되던 19공탄은 22공탄이나 25공탄으로 바뀌었다. 1989년에 와서 산업표준에 의하여 1~5호까지의 연탄규격이 정해졌고, 그 중에 흔히 사용되던 가정용 연탄은 지름 15.8cm, 높이 15.2cm의 2호 연탄이다. 연탄의 크기와 구멍의 숫자는 화력과 관계가 깊은데, 1957년 만들어진 31공탄과 49공탄 등의 대형 연탄은 영업용으로 널리 쓰였다.

연탄의 편리함은 난방의 용도뿐만이 아니었다. 부엌 아궁이 앞에서 끼니마다 장작불을 지펴 음식을 해야 했던 여성들에게 연탄은 곧 ‘여성해방’이었다. 장작불보다 관리하기 편하고 꺼지지 않고 일정한 열량을 유지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편리했다. 커다란 솥에 물을 담아 얹어 놓으면 더운 물도 넉넉히 사용할 수 있었다.

연탄 구하기

난방연료로 연탄 사용이 보편화되었지만, 문제는 언제나 부족한 연탄 공급량이었다. 겨울마다 연탄공장에서는 철야작업까지 하면서 연탄을 생산했지만, 연탄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겨울마다 되풀이 되는 연탄파동이었다. 결국 웃돈을 주거나 미리 사재기를 하는 집들이 많았다. 게다가 집이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있으면 배달도 잘 해주지 않았고, 사정사정해서 배달을 해주더라도 더 많은 웃돈을 붙여줘야만 했다. 연탄장수에게 밉보이면 따뜻한 겨울을 나긴 어려울 지경이었다. 1966년 1차 연탄파동을 겪으면서 주부들은 핸드백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연탄이 몇 장 밖에 남아 있지 않으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하소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제1차 석유파동을 겪은 후인 1974년에도 겨울철 연탄 부족사태가 예상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여름에 너도나도 연탄을 사재기하여 품귀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연탄수급상황 파악 참고 이미지
연탄수급상황 파악(1966)
연탄공급 참고 이미지
연탄공급(1974)

위험한 필수품, 연탄

연탄 사용이 늘어난 1960년대부터 겨울철만 되면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마다 연탄가스로 가족이 참변을 당했다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유용한 연탄 속에는 생명을 빼앗는 살인 가스가 들어있다.”는 기사처럼 연탄은 이제 ‘위험한 생필품’이 되고 말았다. 한겨울마다 수백 명이 연탄가스로 인해 희생되었으니 정부에서도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정부는 가정에서의 사고를 줄이기 위해 가스를 막을 수 있는 계몽강습회를 열거나 교육 강좌 후 관련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집중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연탄가스 사고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급기야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1960년대 말부터 정부 주도의 연구사업이 시작되었고, 연탄가스 사고 발생시 건물주와 시공사에 대해 강력 처벌하는 한편, 미장이에 대한 교육과 수료증 발급, 아파트 등의 공동주택에 대한 안전검사 실시 등 적극적인 대처를 하였으나 연탄가스 사고는 1970~1980년대에 오히려 더 증가하였다. 연탄가스가 사라진 것은 1990년대 가스나 기름보일러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부터였다.

연탄가스 중독사고 방지 캠페인 참고 이미지
연탄가스 중독사고 방지 캠페인(1988)
(집필자 : 조정미)

참고자료

  • 김수철, 「서울市 연료수급대책 과 전망, 연탄수급을 중심으로」 『도시문제』 159호, 1979.
  • 김옥주, 박세홍, 「1960년대 한국의 연탄가스중독의 사회사:부주의로 인한 사고에서 사회적 질병으로」, 『의사학』 제 21권, 2012.
  • 김은정, 「일제의 조선무연탄주식회사 설립과 조선 석탄자원 통제」, 『한국민족운동사연구』58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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