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메뉴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내용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손기정과 황영조가 민족과 함게 뛰었다! 마라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이후 꽤 오랫동안 마라톤은 우리 국민들에게 어떤 희망이나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1992년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따기까지 56년간 한번도 금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마라톤 금메달은 언젠가는 태극기를 달고 당당히 가져와야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나라를 잃어 어쩔 수 없이 일장기를 달고 딴 손기정의 금메달에 대한 민족의 집단 기억은 자랑스러움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광복이후, 마라톤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가 반드시 극복해야할 식민지의 상처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손기정 이전의 역사

마라톤은 고대 그리스시대, 마라톤 들판에서 아테네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자, 한 병사가 이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서 아테네까지 약 40㎞를 쉬지 않고 달려가 “우리가 승리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기뻐하라.”라고 외치고는 죽은데서 기원한다.
마라톤은 제1회 아테네올림픽 때부터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이 소르본대학의 브레얼 교수에게 마라톤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올림픽 종목에 포함시키면서 시작한 것이다. 마라톤의 정식 거리가 42.195km로 정해진 것은 제4회 런던 올림픽대회부터 이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마라톤 경기의 효시는 ‘조선체육협회’가 1920년 개최한 ‘경성 일주 마라톤’이었다. 이때의 마라톤은 42.195km 전체 경주가 아니라 25km 경주였다. 이 경기에서 최홍석이 2시간 11분 27초로 우승하였다.
이후 우리나라 마라톤은 많은 대회를 개최하며 해를 거듭할수록 기록을 단축해갔다. 식민지 시대 변변한 운동 기구도 없던 시절, 우리나라 사람이 쉽게 할 수 있었던 스포츠는 ‘달리기’였다. 그래서인지 마라톤은 급속도로 발전해 1920년대 후반 한성역전 마라톤대회에서 양정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잘 훈련된 일본팀을 물리치고 3연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식민지 치하의 설움에 젖어 있던 우리 민족에게 마라톤은 이때부터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 마라톤 선수가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것은 1932년 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대회였다. 이 경기에서 김은배가 2시간 37분 28초로 6위, 권태하가 2시간 42분 52초로 9위에 입상하였다. 이미 이 시기에 우리나라 마라톤의 실력은 세계 수준으로 올라서 있었다. 올림픽에서 메달권 진입이 단지 꿈만은 아니었다.

제1회 국제마라톤대회 참고 이미지 제1회 국제마라톤대회 참고 이미지
제1회 국제마라톤대회(1959)

손기정과 황영조

현재 우리나라에서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은 손기정과 황영조 두 사람 뿐이다. 비록 일장기를 달고 얻은 금메달이었지만 손기정의 금메달은 1992년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태극기를 달고 금메달을 딸 때까지 유일했다.
손기정은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당시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올림픽대회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 함께 경기에 참가했던 남승룡이 2시간 31분 42초 2로 3위를 하였다.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영광의 선수들이었지만, 손기정과 남승룡은 시상식에서 내내 슬픈 표정이었다. 가장 기쁜 순간에 그들은 일장기를 달고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듣는 가장 슬픈 신세였던 것이다.
손기정의 일장기를 가슴 아파했던 것은 손기정뿐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였다. 그래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도 일어난 것이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일제강점기 내내 우리민족에게는 자부심이었고 광복 후에는 그의 금메달을 기리며 당당히 태극기를 달고 또 하나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오겠다는 목표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 1947년에는 ‘제51회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로 우승하였다. 1950년 ‘제54회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도 함기용이 2시간 32분 39초로 우승하였고, 송길윤이 2위, 최윤칠이 3위를 차지하는 등 마라톤 강국의 패기를 보여주었다. 해마다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8월 9일을 기리며 국내에서는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마라톤은 세계의 높은 장벽을 넘지 못하고 점차로 후퇴하는 분위기였다.

손기정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 우승 참고 이미지
손기정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 우승
(1936)
세계재패 기념단축마라톤 경기 참고 이미지
세계재패 기념단축마라톤 경기(1957)

오랫동안 침체되었던 마라톤은 황영조의 금메달로 다시 활기를 찾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에서 황영조는 2시간 13분 29초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56년 동안의 숙원이 마침내 풀린 것이다. 시상식에서 황영조는 당당히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가 울리는 가운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8월 9일 황영조가 금메달을 딴 날은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날과 같았다. 당시 손기정은 황영조의 우승을 자신의 우승처럼 여기고 기뻐했다고 한다.

황영조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황영조 선수 참고 이미지
황영조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황영조 선수(1992)
영예수여(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 한국선수단 마라톤선수 황영조등) 참고 이미지
영예수여(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 한국선수단
마라톤선수 황영조등)(1992)

한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는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신문사가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가 부상으로 있었다. 이 투구는 손기정에게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50년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에 가서야 손기정의 손에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를 1994년 국가에 기증하였다.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기념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 참고 이미지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기념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1988)
손기정옹 투구(고대그리스 투구) 조사결과 및 향후조치계획 보고 참고 이미지
손기정옹 투구(고대그리스 투구) 조사결과 및 향후조치계획 보고(1985)
(집필자 : 김정미)

참고자료

  • facebook
  • twitter
  • print

주제목록 보기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