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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이루어진다, 벽을 넘어서... 올림픽과 월드컵

금세기 우리나라 국민들은 국제스포츠대회를 통해 두 번이나 큰 감격을 누린 적이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 바로 이 최대 규모의 국제스포츠 이벤트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이다. 난생 처음 우리네 안방에서 벌어진 지구촌 축제의 뜨거운 감동의 물결에 파묻혀 얼마나 가슴 벅차고 행복했던가. 돌이켜 보면 참으로 지칠 줄도 모르고 모두 신이 나서 준비하고 치러낸 행사들이었다. 지금도 그 순간만 생각하면 두고두고 가슴 뭉클하고 짜릿한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한민국 서울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이 열렸다. 개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당시 김포공항에는 연일 약 1분 간격으로 각국 선수단과 관광객을 실은 비행기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실로 사상 초유의 장관을 연출하면서 우리들의 심장은 고동치기 시작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울올림픽 공식주제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전 세계를 향해 쏘아 올리는 서울올림픽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한국이란 나라의 이미지가 어떻게 떠오를지 전 세계의 이목(耳目)이 온통 서울올림픽의 개막식에 쏠려 있었다.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의 문화와 정신, 발전과 변화의 역동성, 투혼을 보여줄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행사가 아니다. 올림픽을 개최하는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국력과 문화와 산업, 경제에 대한 신뢰는 물론 자기네 나라의 브랜드가치를 높이려 든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올림픽 개최를 꿈꾸는 것이다.

올림픽을 유치하려는 우리의 계획은 1979년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그때 국민체육진흥심의회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의 서울유치계획을 의결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우리의 결의를 대내외에 발표했다. 이로써 우리는 올림픽 유치경쟁에 뛰어 든 것이었다. 후보도시는 대한민국 ‘서울’과 일본 ‘나고야’로 좁혀졌다. 드디어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는 79명의 IOC위원들이 투표에 들어갔다. 모든 국민이 한밤중에 잠을 설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입에서 서툰 발음으로 ‘쎄울’이 터져 나왔다. 모두들 부둥켜안고 감격의 환호성을 울렸다. 대한민국 서울이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제24회 올림픽 한국유치계획 썸네일 이미지
제24회 올림픽 한국유치계획(1979)

그날로부터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는 1988년까지 우리는 모든 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했다. 역대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160개국, 8,391명의 최대 규모 참가선수단, 모처럼 동서진영의 ‘화합과 전진’을 목표로 인류평화의 대축제가 서울에서 열린 것이었다. 최고 수준의 시설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과학올림픽, 한국적 멋을 담은 독창적 문화예술, 성숙된 국민의식, 그리고 끝내 흑자올림픽을 이뤄내는 성과를 거뒀다. 개발도상국이자 분단국가로서는 처음 개최하는 올림픽으로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23개의 정식종목과 3개 시범종목에서 한국은 종합 4위라는 역사상 최고 성적까지 얻었다. 서울올림픽 기간 중 각종 학술대회와 음악제, 국악제, 무용제, 연극제, 전시회 등의 문화행사가 펼쳐졌고, 올림픽이 끝난 후에는 관광, 전자, 통신, 스포츠용품 등의 산업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은 지구촌 중심국가로 떠올랐다. 성공적인 국제스포츠대회를 우리가 해낸 것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 성화 그리 헤라신전에서 채화 썸네일 이미지
제24회 서울올림픽 성화 그리 헤라신전에서
채화(1988)
제24회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최종주자 성화봉송하는 모습 썸네일 이미지
제24회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최종주자
성화봉송하는 모습(1988)
제24회 서울올림픽 개회식행사 썸네일 이미지
제24회 서울올림픽 개회식행사(1988)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모든 나라들은 직접 또는 영상으로 흘러나오는 대한민국의 천지개벽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분단국가가 어떻게 저런 훌륭한 문화를 간직하고 놀라운 경제적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서울올림픽이 있기 전까지는 한국이란 나라가 지구촌 어디쯤에 붙어있는지도 잘 몰랐던 나라들도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서울올림픽 개최로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때 얻은 자신감과 성취감은 14년 후 2002년 월드컵 개최로 이어졌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유치경쟁에 뛰어들기로 결정했을 때는 이미 일본이 훨씬 앞서 표를 다져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아무도 2002년 월드컵의 한국 유치를 낙관하지 못했다. 우리는 결코 굽히지 않았다. 당당하게 일본과 유치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1996년 5월 31일 스위스의 국제축구연맹(FIFA) 본부에서 투표를 통해 우리나라와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공식명칭은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 이었고, 기본이념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로 정해졌다. 월드컵사상 초유의 2개국 공동개최의 선례를 만들어냈고, 아시아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치러지는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가 되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활동 계획 보고 썸네일 이미지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활동 계획 보고(1993)
2002년 월드컵축제 한·일 공동개최 썸네일 이미지
2002년 월드컵축제 한·일 공동개최(1996)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31일간 한국과 일본에서 또 하나의 지구촌 국제스포츠대회 빅 이벤트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도 또 다시 우리는 전 세계가 놀랄만한 대한민국의 달라진 모습들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더 이상 과거 굶주림에 허덕이던 변방의 작고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열띤 응원문화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붉은 악마’라는 응원단의 주도 아래 남녀노소 모두가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열심히 응원을 펼쳤다. 그때 등장한 키워드가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와 “꿈은 이루어진다.”였다. 우리 민요 아리랑을 응원가로 편곡해 목이 터져라 불렀다. ‘한국’ 대신 ‘대한민국’이란 풀 네임이 떠올랐고, 태극기를 온몸에 휘감거나 얼굴에 색칠하고 거리를 활보했다. 우리 대표팀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다.

2002 월드컵 개막식 썸네일 이미지
2002 월드컵 개막식(2002)
2002 월드컵 응원 인파(한국-이탈리아전) 썸네일 이미지
2002 월드컵 응원 인파(한국-이탈리아전)
(2002)
2002 월드컵 4강전(한국-독일) 애국가 제창 썸네일 이미지
2002 월드컵 4강전(한국-독일) 애국가
제창(2002)

그 후로 우리나라는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광주 유니버시아드대회를 개최했고, 굵직한 국제스포츠대회 가운데 마지막 남은 빅게임이라 할 수 있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2018년에 열기로 되어 있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최만립,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생각의 나무, 201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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