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4대 사회악을 정해 이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에서 말하는 4대악은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 이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몇 대 사회악이라는 말은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비버리지(William Henry Beveridge)가 한 말로, 그는 인간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5대 사회악으로 궁핍, 질병, 무지, 불결, 태만의 5가지를 꼽았다.
1960년대는 국민의 모든 생활을 일사분란하게 정돈하려는 시대였기에 몇 대 사회악을 정해 이를 근절시키려는 노력도 다른 시기에 비해 남달랐다.
1966년 2월 치안국이 발표한 당시의 5대 사회악은 밀수, 마약, 탈세, 폭력, 도벌이었다. 경제체계와 세금징수체계가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시기라 그런지 사회악에 밀수나, 탈세 등의 경제사범을 포함시킨 것이 특이하다. 이 경제사범 단속에 삼성그룹이 사카린 밀수로 걸려들어 정치․경제적으로 큰 사건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나무를 몰래 베어내는 도벌이 사회악에 들어 간 것도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산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화 되었고, 변변한 난방자원이 없던 시절이라 나무를 땔감으로 몰래 벌채하는 일도 많았다. 1960년대는 정책적으로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국가적 사업도 있었던 만큼 나무를 몰래 베어내는 일도 사회악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경찰은 1966년에 지역별 검거 책임제를 실시하여 5대 사회악의 단속을 소홀히 하거나 관내에서 발생한 범죄를 타 기관에서 적발하는 경우 관련 책임자를 문책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말의 5대 사회악은 폭력, 가정파괴, 인신매매, 마약, 부정식품이었다. 1980년대는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등으로 사회 전체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기였지만, 그 이면에 성범죄가 급증하고 조직폭력배가 극성을 부리는 등 어두운 면도 있었다. 1960년대가 경제사범을 사회 5대악의 한 주축으로 삼았다면, 1980년대 사회 5대악은 주로 폭력과 성범죄를 주목하였다. 이전 시기보다 개인이 저지르는 범죄의 질이 흉악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1989년 치안본부는 5대 사회악의 특별단속을 지시하였는데 이에 경찰은 단속강화를 위해 인력 및 장비를 보강하였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등 6대 도시에 무술유단자 등의 전문요원을 뽑아 각 사안별로 편성해 운영하는 한편, 공조수사 체제를 구축하였다. 범죄가 교통수단의 발달 등으로 광역화되었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경기․인천지역의 방범, 순찰, 기동을 맡은 전 차량에 통신망을 연계하는 등 수도권 초동공조 체제를 만들었다.
경찰은 또 강도 및 절도범이 피해자의 신고를 막기 위해 성폭행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자, 성폭행범죄에 대해서는 「특별범죄 가중 처벌법」을 적용해 살인범에 준하는 중벌로 다스렸다. 청소년 범죄에 관해서는 비행청소년의 집단 폭행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을 주시하여 이를 단속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경찰은 급증하는 마약사범 근절을 위해 항만 및 공항 등 관할 91개 경찰서에 전문요원을 편성해 마약 전담반을 운영하는 등 전문적인 수사체계를 확립하고, 국제협력창구를 마련하여 밀매조직을 단속하기도 하였다.
검찰은 범죄 단속을 위해 조직을 강화하였는데, 대검찰청에 민생치안문제를 전담하는 강력부를 신설하여 인신매매, 가정파괴, 조직폭력, 마약, 부정식품 사범 등 5대 사회악에 강력 대처하였다. 검찰은 이와 함께 공직자의 뇌물수수 사건 등 공직부패사범에 대한 국민들의 수사 요구가 높아지자 이를 직접 조사하기 위한 조사부를 서울지검 등에 설치하였다.
이러한 경찰과 검찰의 범죄단속 분위기 속에서 1990년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일도 있었다. 이 ‘범죄와의 전쟁’은 오늘날 까지도 회자되는 말이 되었는데 10월 13일에 발표되어 ‘10·13 특별선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90년 10월 13일 당시 노태우대통령은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선언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골자는 국가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하고 과소비와 투기, 퇴폐와 향락을 바로잡아 '일하는 사회',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이 ‘범죄와의 전쟁’ 선언으로 자정 이후 심야영업이 단속되었고, 유흥업소 단속, 교통질서 위반 집중단속, 청소년보호구역 확대, 가정파괴범·유괴범·흉악범을 비롯한 각종 범죄조직 소탕 등 종합대책이 수립되었다. 또 보복범죄를 특정범죄 가중 처벌 대상에 추가하고 각종 형사 관계법을 개정해 마약, 폭력조직, 인신매매, 가정파괴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약 16,000명의 경찰이 충원되었고, 경찰청 보안부는 방범국으로 개편되어 각 지방청 및 경찰서의 방범부서에서 범죄예방과 진압을 담당하도록 했다. 경찰은 방범순찰차와 이동방범파출소를 운영하고, 행락철에는 특별방범활동을 실시했으며, 불법무기류 자진신고 및 단속을 강화했다. 또 방범홍보활동을 전개하여 자율방범대를 조직하고, 예비군의 방범활동 동참이나 금융기관의 자율방범기능 등을 통해 치안 유지를 위한 민간협력을 촉구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지 2년 만에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등 5대 범죄가 선포 전에 비하여 5.9%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검경(檢警)을 동원해 조직폭력배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을 벌여 1년간 1,923명을 검거했고, 단기적으로 폭력범죄조직의 와해를 이끌어내며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범죄와의 전쟁’은 이미 1989년부터 진행됐던 검찰 수사로 폭력조직 상당수가 검거된 상황에서 선포된 것으로, 검찰의 수사 실적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