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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학교를 졸업하면 양복을 갈아붙이고 의자를 타고 앉아서 월급이나 타 먹으려는 공상부터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의 남녀가 총동원을 해서 둥쳐 매고 민중 속으로 뛰어 들어서 우리의 농촌, 어촌, 산촌을 붙들지 않으면, 그네들을 위해서 한 몸을 희생해 바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합니다.” 이 말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구절로 주인공 채영신이 농민운동 보고회에서 지식인들의 농촌활동 필요성을 역설한 내용이다. 브나로드 운동이나 농촌계몽운동 등은 1920~30년대 피폐한 농민들의 삶과 함께 했던 농촌운동으로 요즘의 농촌봉사활동이 그 계보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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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530호] 학생 농촌 봉사활동(1965)

농촌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방학 기간 동안 대학생들이 단체로 농촌 지역에서 부족한 일손을 거들었던 ‘농촌봉사활동’ 줄여서 ‘농활’이라고도 불렀던 이 활동은 농촌의 실정을 이해하는 활동의 일부로서 농촌계몽활동, 브나로드 운동, 농민학생연대활동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1920년대 사회 문화단체는 민족자결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운동을 여러 방면에서 전개하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대학생 및 지식인들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을 근대화하기 위해 농촌계몽활동을 펼쳤다. 이때의 농촌계몽운동은 식민교육에 맞서 민족교육을 심화시키는데 주력하여, 야학 등을 통해 어린이, 여성, 문맹자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농촌의 생활 개선과 농업의 개량을 위해 농민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직접적인 교육도 함께 실시하였다. 주로 농한기인 겨울방학 때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민족운동에 고취되었던 많은 학생들이 농촌으로 몰려갔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농촌계몽운동이 활발해지자 언론사들도 동참하였다. 1929년 조선일보에서는 한글 보급을 중심으로 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31년에는 ‘브나로드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동아일보가 계몽운동에 참가하였다. 원래 ‘브나로드’는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말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구호였다.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계몽운동의 별칭처럼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농촌봉사활동이 독립을 이루기 위한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 추진되었다면 광복 후에는 농촌 사회의 근대화를 목표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 초 향토개척단 운동이 나타나면서 격동의 시기 일시적으로 미미했던 농촌봉사활동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향토개척단은 서울대학교 안에 있던 여러 농촌운동단체와 YWCA 그리고 독립된 여러 농촌운동단체가 합쳐진 연합체였다. 향토개척단은 1961년 200여 농촌 지역에 1,500여 명의 농촌봉사대를 파견하는 것을 시작으로 1985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정부가 주도하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1970년대도 농촌의 발전을 위한 여러 계몽운동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사회운동의 개념이 강화되면서 ‘농촌봉사활동’이라는 말에서 ‘봉사’라는 말을 뺀 ‘농촌활동’으로 바뀌었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에서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대학생들의 농촌활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전국 대학을 총망라하는 연합체 활동이 전개되었다.

  • 대학생 농촌문맹퇴치 계몽 활동
  • 대학생 농촌문맹퇴치 계몽 활동
    (1962)
  • 학생농어촌개발봉사단 발단식
  • 학생농어촌개발봉사단 발단식
    (1969)
  • 중앙대학교학생 하계방학 근로봉사단
  • 중앙대학교학생 하계방학 근로봉사단
    (1969)

진정한 땀방울의 의미를 새기며

보통 방학 때 이루어지는 농촌봉사활동은 출발 전부터 농민들의 의식을 어떻게 개선시킬 것인지,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 필요한 공부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을에 도착해서는 ‘근로활동’과 ‘분반활동’으로 나눠 활동을 한다. ‘근로활동’은 직접적인 노동봉사로서 농민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기도 하지만, 농기구 수리 등 기술봉사와 의료봉사와 같은 활동도 병행한다. ‘분반활동’은 주민들을 연령과 성별로 나누어 특징에 맞는 교육이나 활동을 진행한다.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농촌에 가서 부족한 일손을 돕고, 노동의 가치와 농촌의 현실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

1960~70년대가 주로 동아리 중심의 소규모 농촌봉사활동이 다수였다면 1980~90년대에는 총학생회와 농민회가 연대해 농민봉사활동을 이끌었다. 1980년대부터 봉사활동의 명칭도 농민과 학생이 하나 된다는 뜻을 지닌 ‘농민학생연대활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농촌 일손 돕기
  • 농촌 일손 돕기
    (1992)
  • 근로자의 날 위안공연회
  • 대학생 농촌의료봉사활동
    (1993)
  • 노동절 30주년 전국기념대회
  • 농촌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대학생
    (1995)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들과 농민들의 참된 이해 증진을 목표로 하는 대중농촌활동, 생활농촌활동이 펼쳐졌다. 예전과 같은 농활이 아닌 이른바 ‘대안적 농활’이라는 것이 생겨났으며 환경현장활동, 유기농활처럼 다양한 현장체험 프로그램들이 생겨났다. 환경농촌활동이라는 이름으로 골프장이나 폐기물 소각장, 원자력발전소 건설 등 환경문제가 심각한 지역을 찾아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해외농촌활동에도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보여 ‘태평양 아시아 청년봉사단’과 같은 단체에서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7개 나라에서 농촌일손돕기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주도한 여름방학 농촌봉사활동에는 전국 142개 대학에서 6만여 명의 학생이 참가하면서 사상 최대 규모를 보이기도 했다.

농촌 일손돕기운동 추진계획 농촌 일손돕기운동 추진계획 농촌 일손돕기운동 추진계획
농촌 일손돕기운동 추진계획(1992)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상황이 변했다. 경제 침체와 청년 실업률의 증가로 인해 대학생들은 스펙을 쌓고 취업 준비를 하느라 농활에 참여하는 수가 줄어들었다. 또한 방학 중의 활동도 도시봉사활동, 환경봉사활동, 중소기업봉사활동, 해외봉사활동, 여성봉사활동, 정보기술(IT) 봉사활동 등 현장체험과 봉사가 중시되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농촌활동도 학생들의 전공을 살려 농촌 지역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농산물 수확과 관리, 환경 미화와 같은 작업은 물론 다문화가족과 함께 하는 캠프, 벽화그리기와 같은 지식 나눔 봉사활동으로 전개되었다. 예전만큼 많은 수의 학생들이 농촌봉사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만, 여전히 농촌봉사활동의 의미는 되새겨볼 만하다.

(집필자 : 황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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