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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국과 일본이 20년 만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한일회담을 열었다. 6월 22일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외무상은 도쿄에서 한일협정에 정식 서명하며 다양한 면에서 양국이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우리 대중문화를 파고들 왜색을 걱정했다. 심지어 일본 대중문화가 일방적으로 침투 될 것이라고 예측할 정도였다.

“대중문화가 야단이라는 것이다. 순수문화는 의식성이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지만 대중문화는 의식성이 없고, 무선택성으로 해서 퇴폐적인 풍조만을 잔뜩 번식시킬 우려도 있다면서 영화, 출판의 책임이 중차대하다는 경고를 발했다. 수지균형을 생각 않을 수는 없지만 상품성만을 고려할 때 반민족적인 죄과를 저지르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한일회담 조인 후에 오는 것>, 《경향신문》, 1965.06.25.

그런 우려로 인해 우리나라 지상파 TV에서 일본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노래가 방영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1980년대 TV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왜색은 지운 채 캐릭터 이름도, 배경도 모두 우리 실정에 맞게 바꿔야 방송이 가능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이 좋아했던 <우주소년 아톰>, <은하철도 999>, <마징가 Z> 등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우리의 작품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 대중문화는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와 함께 비공식적으로 개방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누구도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두려움 없이 임하라

1998년 4월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방문을 계기로 ‘시기상조설’, ‘시의적절설’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일본대중문화개방에 관하여 과감히 ‘개방’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광복 이후 50년 만에 일본 문화에 대해 굳게 닫혔던 빗장이 풀렸다. 당시 문화관광부 신낙균 장관은 각계 인사를 모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자문 기획단’을 구성하고 구체적인 실무계획 수립에 나섰다. 일본 문화 개방 분야를 선정하는데 많은 논의를 거쳤고 국민의 거부감이 많이 들지 않는 ’비교적 ‘왜색’이 옅은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개방하기로 하였다. 개방 분야는 '즉시 개방'과 '즉시 개방 이후' 부문으로 나뉘었고 1차적으로 영화· 비디오만이 개방됐다. 한일합작영화, 일본 배우가 출연한 한국영화, 4대 국제영화제 수상작 등에 한해 개방이 허용 되었고 이 작품들의 비디오 출시도 허용되었다.

일본대중문화 개방 방침 통보(1998, DA0746984(7-1)) 참고이미지
일본대중문화 개방 방침 통보(1998)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 ‘하나비’가 국내 일본 영화 개방 1호로 1998년 12월 5일 극장에서 개봉됐으며 이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가 선보였지만 두 작품 모두 흥행은 예상 밖으로 저조했다. 일본문화개방은 재일교포 작가들의 국내 활동은 물론 한일합작영화의 물꼬를 트는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재일교포 2세 유미리 작가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가족시네마〉는 우리나라의 박철수 감독이 연출을 맡고 재일교포 희곡 작가 양석일과 유미리 작가의 동생 유애리가 출연,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 현역배우들이 출연하고 나라와 오사카 등지의 일본 현지에서 촬영된 작품이었다. 또한, 1999년 일본에서 개봉했던 공포 영화 〈링〉은 한일합작 영화로 다시 한 번 만들어졌는데 김동빈 감독이 연출을 맡고, 배우 신은경, 정진영이 주연을 맡아 원작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 전의 한일 합작 영화는 일본이 전액 투자하고 한국 감독이 기용되는 방식이었으나 1998년에 제작된 〈링〉의 경우 12억 5천만 원의 제작비를 한국과 일본이 나눠서 부담한 첫 한·일 자본합작으로 기록됐다.

2차 개방이 바꿔놓은 문화

이듬해 실시한 2차 개방에서 영화의 경우 공인된 국제영화제 수상작과 전체관람가 영화로 확대되고 일본어판 출판 만화, 만화잡지도 포함되자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일본대중문화 2차 개방 방침 통보(1999, DA0549622(11-1)) 참고이미지
일본대중문화 2차 개방 방침 통보(1999)

“정부의 2차 개방으로 한·일간의 대중문화 전쟁이 시작됐다. TV와 애니메이션은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지만, 일본 대중문화는 사실상 개방된 상황이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영화, 가요, 출판, 만화 등 각 분야에서 자극적이고 흥행성 높은 일본 문화상품과 우리 문화상품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서 가요까지 ‘안방상륙’ 일 대중문화 2차 개방 파장>, 《경향신문》, 1999.9.10.

하지만 일본과 한국의 영화관계자들은 사실상 한일 영화계에 새 시대가 열렸다면서 미국 영화가 주도하는 영화 산업에서 한국과 일본이 합작 또는 인적 교류를 꾸준히 이어나간다면 미국 영화 시장을 극복하는 새로운 아시아 파워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1999년~2000년 사이에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와 <러브 레터>가 우리 극장에서 개봉하였고, 우리 영화 <쉬리>는 일본에 진출해 상영됐다.

3차 개방 이후 닥친 문제

2000년 6월 실시한 3차 개방때에는 비디오, 공연, 게임, 방송 등 상당 분야로 확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순풍을 타던 한·일 관계에 찬물을 끼얹은 일이 발생하였다. 2001년 4월 3일, 일본에서 우익 성향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측에서 만든 교과서가 2002년도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로 검정을 통과하게 되면서 한일관계는 얼어붙었다. 다음 날인 2001년 4월 4일, 우리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 성명 및 외교 경로를 통해 일본에 유감의 뜻을 전달하였고 2001년 7월 12일 정부는 일본 대중문화 추가개방을 무기한 중단하기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후 2001년 10월 15일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한·일 양국은 정상회담에서 역사공동연구에 합의하였으며, 2002년 3월에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일본대중문화 3차개방계획(2000, BA0673827(2-1)) 참고이미지
일본대중문화 3차개방계획(2000)

2004년 1월에는 영화, 음반, 게임 부문은 전면 개방하되, 쇼·오락 등 일부 방송 프로그램과 방송·극장용 성인애니메이션은 업계 등과 논의를 거쳐 허용 폭을 확정하기로 했다. 당시 또 한 번 일본 대중문화에 우리 대중문화가 존립하기 힘들 거라는 예상과 우려가 이어졌으나, 이 시기에 일본에서 한류 붐(한국 대중문화 열풍)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KBS에서 2002년 방송하였던 〈겨울연가〉(배용준, 최지우 주연, 윤석호 감독)를 2003년 일본의 NHK가 위성채널을 통해 방송하였고, 시청자들의 재방송 요청에 의해 2004년 4월 NHK 지상파 채널에서 방송되면서 붐으로 이어지게 된다. 일본 언론은 배우 배용준을 ‘욘사마’로 호칭하기 시작했고, 〈겨울연가〉 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한 장동건, 이병헌, 원빈 등 소위 ‘한류사천왕(韓流四天王)’ 등의 일거수일투족은 일본 언론에 회자하게 됐다. 일본 대중문화에 무차별적으로 종속되어선 안 된다며 꽁꽁 걸어 잠그고 있던 개방의 문을 열자 우리는 뜻하지 않게 우리 문화의 역수출을 이뤄냈다. 한류 붐은 재일한국인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문화를 접하려는 일본인들이 많아지는 현상까지 낳았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김성민, 『일본을 금하다 (금제와 욕망의 한국 대중문화사 1945-2004)』, 글항아리, 2017.
  • 조규철,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한일관계」, 세계지역연구논총 2000년 15권, 2000.
  • 「4월18일···일본 문화 개방」, 경향신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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