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후유증은 너무 컸다. 남한의 제조업은 1949년과 비교해 42%가 파괴되어 엄청난 경제적인 피해를 입었다. 도로와 주택, 철도와 항만 시설 등 국토는 황폐화되고 산업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 허허벌판이 된 우리 국토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 시급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으로 어려워진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경제 원조를 적극 활용하였다. 미국의 경제 원조는 부족한 물자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으나 폐허 속의 국토를 다시 일으키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장면 내각은 어떻게 하든지 경제를 부흥시키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경제 제1주의를 천명하면서 다양한 경제관련 정책을 추진했다. 이때 제시된 경제정책의 골자는 첫째, 국민정신의 혁명을 위한 국토건설사업의 시행, 둘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수립이었다. 이 중에 국토건설사업은 국민 대다수와 직접 관련된 사업으로 장면 내각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역점 사업이었다. 장면 내각은 6.25전쟁 이후 고학력자들의 청년 실업문제가 심각해지자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국토건설사업을 기획, 발의하였다. 국토건설사업을 현장에서 지휘·감독할 사람을 모아 국토건설본부(國土建設本部)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국토건설본부의 창설 초기 단장은 장면 총리가 직접 맡았고, 기획부장에는 장준하, 강사진으로는 정헌주, 장준하, 주요한, 함석헌 등이 활동하였다. 총 2,000여 명의 인력을 국토건설추진요원으로 선발하였고 이들은 1961년 1월 9일부터 2월 27일까지 사전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입소 및 등·하교 형태로 2∼4주간 교육을 받았는데, 제도, 작도방법, 측량, 건축 또는 토목 시공 실무에 대한 기술 교육을 받았다. 더불어 체력 단련은 물론 정신교육, 국가관, 이론 교육 등의 수업을 받았다. ‘국토건설추진요원’들의 교육이 끝난 1961년 2월 27일 오후 2시 중앙청에서는 수료식이 거행되었다. 꽃샘추위에도 불구하고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들을 축하해 주었다. 수료식을 마친 후, 국토건설추진요원들은 삽 한 자루씩을 멘 채 서울시가를 행진하면서 국토건설에 대한 그들의 의지를 다졌다. 국토건설추진요원들은 국토건설사업이 시작된 지방으로 분산 파견되어 국토개발 사업과 건축, 도로 공사 등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다. 국토건설사업은 장면 정권이 짧은 기간에 추진한 정책 중에 가장 효과적인 사업이었으며, 무엇보다 심각했던 실업자 구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국토건설추진요원들이 각 발령지에서 국토건설사업을 진행하던 중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였다. 국토건설본부는 5.16 군사정변 이후 대상자와 목적, 명칭이 바뀌었다. 1961년 12월 「국토건설단 설치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법 안에 따라 당초의 국토개발과 일자리 확충이라는 국토건설본부의 설립 취지를 변경하여 국토건설단을 만들고 그 대상자를 군 미필자로 바꾸었다.
“병역 미필자들은 국가를 위해 노동으로 봉사하고 떳떳하게 살아라. 28세가 넘은 사람이 18개월간 국토건설단에서 일하면 예비역에 편입시킨다”라는 발표가 나가자 당시 15만 여 명에 달하던 병역 미필자 중 일부가 자진신고로 국토건설단에 자원했다. 그들은 28세 이상의 병역미필자, 국방부 장관이 현역병으로 부적당하다고 인정한 자, 징병적령자로서 징집이 면제된 자, 근로동원에 관한 법령에 의해 동원되는 자등이었다. 당시 국토건설단에 입단하려면 국군병 징병검사에 준하는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신체 결함이 있거나 국토건설원으로 작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불합격시켰다.
국토건설단은 1962년 2월 10일 11시 중앙청 홀에서 창단식을 가졌다. 국토건설단원은 건설원과 기간요원으로 나뉘었다. 기간요원은 국가공무원의 신분이었고, 예비역이나 특수기술 소지자 중심으로 국토건설 사업에 헌신적으로 종사하기 위해 지원한 사람이 임명됐다. 건설원은 28세 이상의 방역미필자와 징병적령자로서 징집면제자 등에서 편입하기로 하였는데, 근무연한은 18개월이지만 지원자는 12개월이었다. 창단식 후 3,000명의 기간요원은 현장으로, 10,000여 명이 넘는 건설원이 울산공업단지, 소양강댐과 남강댐 건설, 정선선, 경북선 건설 등에 투입되었다.
“한마음 한뜻으로 겨레가 뭉치어 / 흘리자 땀방울을 국토 건설에 / 기름진 이 강토에 뿌린 이 정성 / 내일은 꽃이 되어 곱게 피리라 / 우리는 조국의 기둥이 된다/ 아~새터전 이룩하는 국토 건설대” 이 노래는 태백선 건설공사 당시 건설대원들이 아침마다 일터로 행진하면서 부르던 노래였다. 요즘으로 치면 대체복무와 비슷한 것이어서 이들의 작업복과 작업모, 작업화도 육군이 입는 것과 같았다.
국토건설단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행에 따라 필요한 노동력을 운영하면서 군 미필자들이 일정기간의 노력 봉사를 하면 병역의무를 면제해 준다는 1석 2조의 정책이었다. 이들은 국가가 추진한 다목적 수자원개발, 대간척지 개발사업, 태백산 지역을 비롯한 특정지역 종합개발 사업, 천재지변과 같은 사고에 의한 긴급복구사업 등 사회간접자본의 형성을 위한 국가재건에 참여하였으며, 이는 우리나라 고도경제성장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지단과 분단으로 나눠진 국토건설단의 활동 내용을 보면, 제1지단은 진주 남강댐 공사와 섬진강댐 공사에 투입되어 진입도로 23km와 이설도로 32km, 방수로 16km 공사를 담당했다. 제2지단은 춘천 소양강댐 건설공사와 춘천댐 건설공사에 투입되어 진수로 2km 공사를 담당했고, 제3지단은 강원도 정선선 철도 42km와 산업도로 38km 공사를 담당하며, 울산공업센터 공사도 추가했다. 제4지단은 영주와 점촌 간 철도 58km를 공사했다. 또 제1분단은 전라북도 섬진강댐 건설에 앞선 도로공사, 제2분단은 경상남도 울산공업도시 간선도로공사 등에 각각 투입되었다. 이렇듯 전국 각지에서 국토건설단의 활약은 대단했다. 당시 국토건설단의 현장 모습을 한 신문에서는 “경남 진양군 나동면 산골짜기에 텐트를 치고 남강댐 공사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국토건설단 제1지단 소속 2천 80명 건설원들은 삽과 곡괭이로 산허리를 깎아 길을 만들기에 더위도 잊고 있다. 아침 8시 어깨총 대신 어깨삽을 하고 국토건설단가를 높이 부르며 작업현장으로 향한다. 대오 끝에는 지게부대가 따르고 있어 새나라 건설의 한 장면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도 국가가 짊어지었고 국가사업에 낙오는 없다. 모든 괴로움과 온갖 쓰라림을 이겨나가면서도 내일의 참된 보람을 위해 이들은 오늘도 내일도 삽과 망치질을 하며 땀을 흘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렇듯 국토 재건을 위한 특별한 포부와 각오가 있었지만, 국토건설단에 지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공사 진척은 더딜 수 밖에 없었고 고된 노동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더군다나 강압적인 군대식 운영으로 인해 여러 곳에서 반발이 잇따랐다. 이런 운영상의 문제로 여론까지 비판적으로 돌아서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1월 29일 국토건설단의 해체를 결정하고 단원들을 전원 귀향시켰다. 같은 해 12월 17일 「국토건설단 설치법」도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