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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한 자리에 모여 소통의 장을 마련하다

전국 첫 반상회

1976년 5월 3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반상회가 열렸다. 그 전에도 반상회는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동시에 반상회가 열린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오후 6시. 전국 671만 가구에서 1명씩은 ‘이웃끼리 한 자리, 반상회의 집’이라는 푯말이 걸린 집으로 찾아가서 반상회에 참여하였다. 보통 반상회는 동네 명사나 유명한 사람의 집에서 열렸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마을 공터에 멍석을 깔거나 골목 보안등 밑에 모여서 하기도 했다.

반상회는 반장과 구청에서 파견된 담당관이 출석점검을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반상회는 매달 1일인 새마을의 날 하루 전에 열린 것이라 그와 관련된 행정지시사항 전달이 많았다. 기본의제는 새마을운동 확산과 장발 단속 기준 전파, 새로운 주민등록증 휴대 등 8개 사항이었다. 지역별로는 원호 가족 돕기, 불법 무기 자진 신고, 하절기 재해 예방, 위해 식품에 대한 계몽 등을 다루기도 하였다. 공지사항 전달과 토론 등이 이어진 후 행정기관에 민원처리를 건의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자 회의 분위기는 활기를 띄었다. 반상회에서는 주민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다룸으로써 행정기관과 주민간의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반상회의 마무리는 ‘반상회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정다운 이웃들이 모두 모여서 웃음을 꽃피우는 우리 반상회’라는 내용의 ‘반상회의 노래’는 내무부에서 만든 건전가요였다.

반상회 참가캠페인 반상회 참가캠페인 반상회 참가캠페인 반상회 참가캠페인 반상회 참가캠페인
[대한뉴스 제1230호] 반상회 참가캠페인(1979)

전국에서 처음으로 동시에 열린 이날 반상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참여율이 78.4%나 되었다. 그러나 이 참여율은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내무부가 일선 행정, 경찰 조직을 다그치고 참여를 독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각 통장, 반장들은 100%출석이라는 목표를 부여받아 가가호호 방문을 하고 참석을 다짐받았으며 불참하는 사람에게 벌금까지 받기도 했다. 언론도 반상회 참여율에 한 몫 했다. 신문 사설을 통해 ‘반상회는 이웃과 대화도 않는 도시인의 삭막한 폐쇄성을 없앨 수 있는 기회이다. 반상회에 참여해 이웃끼리 따뜻한 인사와 대화를 나누고 도시를 밝고 따뜻하게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날 각 가정에서 거의 한 명씩은 반상회에 참여해 우리나라는 같은 시간에 전국의 25만5천 곳에서 5백26만 명이 한꺼번에 모여 비슷한 의제를 놓고 토론한 대기록을 세웠다.

반상회 운영강화 방안보고 반상회 운영강화 방안보고 반상회 운영강화 방안보고
반상회 운영강화 방안보고(1979)

반상회의 역사

반상회의 기본은 ‘반(班)’이다. 국민조직의 최하부단위인 ‘반’은 행정 활동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단위이다. 행정기관의 필요에 따라 설치된 조직이지만 ‘반’은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이웃과 함께 하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

반상회라는 이름의 조직이 생긴 것은 1917년 일제가 조선인 통치수단으로 ‘반’ 조직을 활용한데서 시작되었다. 주로 주민통제수단으로 이용되어 참석하지 않으면 요시찰 대상이 되거나 배급을 주지 않는 등의 불이익을 받았다. 1938년 전시 동원 체제 하에서 조선연맹 산하에 있는 각 지방연맹 밑으로 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애국반(愛國班)’을 만들었다. ‘애국반’은 사상 통제에서부터 내핍 강요, 배급 통제, 전투병 모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일본에 대한 충성강요가 주목적이었다.

광복 이후 이승만 정권은 반조직을 부활시켜 ‘향보단’, ‘민보단’, ‘국민반’ 등의 조직을 운영하였다. 이들 조직은 국민단합을 표방하면서 국민 동원과 감시, 통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 최규하 국무총리 반상회 참석
  • 최규하 국무총리 반상회 참석
    (1979)
  • 반상회 참석자들과 환담을 나누는 김상협 국무총리 부부
  • 반상회 참석자들과 환담을 나누는
    김상협 국무총리 부부
    (1983)
  • 이영덕 국무총리 공관에서 주민들과 반상회
  • 이영덕 국무총리 공관에서 주민들과 반상회
    (1994)

정치선거 반상회에서부터 부동산 반상회까지

5.16군사정변 직후 반조직은 ‘국민재건운동’과 결합해 ‘재건반(再建班)’이라는 명칭으로 운영되었으며 기능은 이전과 비슷했다. 어떤 때는 매월 두 차례 이상 열어 적극적으로 정권 홍보를 하였다. 1969년 6차 개헌을 앞두고 반상회는 더욱 정치적으로 변해갔다. 선거철이면 반상회에 참여한 부녀자들에게 술을 대접하기도 했고, 연말에는 소액이지만 동장과 반장에게 상여금을 주기도 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으며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직후에는 원래 열려던 예정일보다 6일이나 앞당겨 반상회를 열었다. 북한을 규탄하고 반공의식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이 반상회 이후 매월 25일을 정례 반상회날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왕성했던 반상회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한때 시들해지기도 했지만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체제 홍보와 주민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연희동 반상회에 직접 참석하기도 하고 공중파 방송에서는 반상회 시작 전 25분간 ‘밝고 건강한 사회’라는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반상회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이를 본 뒤 지역사회 정화 회의를 가졌다.

시대가 변해도 정부의 정권홍보수단으로서의 반상회는 계속되어, 시기와 상황에 따라 긴급 소집되는 반상회가 종종 있었다. 1989년 7월 햇볕정책 반상회, 2007년 4월 한미FTA 반상회, 2010년 6월 4대강 반상회 등이 열렸다. 정부가 반상회를 정책 홍보수단으로 활용하면 할수록 반상회의 참석률은 더 떨어졌다. 1980년대 후반에는 반상회 참석률이 40%대를 밑돌았다. 결국 반상회 폐지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사회적인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핵가족화되다 보니 막상 반상회에 참석할 사람이 없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시군정 소식 전달이라는 반상회 개최의 목적과 필요성도 급격히 떨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3년 반상회를 관주도가 아닌 민간 자율에 맡겼다. 그리고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의 판단에 따라 반상회 존속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반상회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국민들의 인식은 긍정적이지 않다. 그동안 반상회가 일방적인 관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정권홍보와 주민통제수단이라는 기능만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집값 담합과 같은 이기적 집단행동에 반상회가 활용되다 보니 반상회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그러나 반상회를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볼 것은 아니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에 따라 이웃 간의 대화가 단절되고 공동체의식도 희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반상회는 이를 회복할 수 있는 좋은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다. 더불어 국가에서 현장민원을 듣고 개선하겠다는 것은 위민행정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주민들의 자율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반상회는 지역 발전의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집필자 : 황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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