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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파병에서 유엔평화군까지...

아직은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1965년 2월 9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대대적인 파월장병 국민환송대회가 거행되고 있었다. 이미 그 전해인 1964년 9월에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 등 소규모 병력을 보내고 나서 새로 편성된 한국군사원조단, 비둘기부대 2,000여 명 장병들에 대한 환송식이었다. 전투부대를 파견하기 직전의 본격적인 월남파병의 시작이었다. 6.25전쟁 때 우방들의 참전과 도움으로 간신히 나라를 지킨 우리가, 이제 건군 이래 처음으로 해외 파병을 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은 것이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표정에는 사뭇 비장함이 배어 있었고, 환송사를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떨렸다.

“이제 우리 국군은 조국을 떠나 해외로 간다. 가서 잘 싸우고 부디 살아서 돌아오라.” 우리의 국방이 결코 완벽해서도 아니었다. 전투사단을 빼내 베트남으로 보내고 나면 북한의 도발이 있지 않을까. 그런 불안을 감수하면서 우리는 미국과 당시 베트남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파병을 결정하고 그 첫 환송식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부대의 파병은 그로부터 8개월 뒤인 1965년 10월 9일에 이루어졌다. 귀신 잡는 해병 청룡부대가 먼저 베트남의 ‘깜란(Cam Ranh)’ 항에 상륙하였고 그 뒤를 이어 맹호부대가 ‘뀌년(Quy Nhon)’에 상륙함으로써 미군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았다. 1966년에는 전투부대의 추가 파병요청에 따라 수도사단 제26연대(혜산진부대)와 제9사단(백마부대)가 월남에 상륙했다. 이로써 파월국군은 무려 5만여 명에 이르렀다.

월남파병에 따르는 문제점(1965, BG0000449 16-1) 참고이미지
월남파병에 따르는 문제점(1965)

우리나라 군대의 최초의 월남전투는 1965년 10월 29일 수도사단 제1연대 제3중대가 뀌년(Quy Nhon) 부근 풍선(Phung Son) 마을에서 집결지를 습격해 온 베트공을 격퇴한 것이다. 이후 1966년 미국의 요청으로 둑꼬(Duc Co)에 투입된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3대대는 북베트남 정규군을 격퇴하면서 승전을 올렸다. 1967년 3월부터 2개월 간에 걸친 오작교 작전은 분리되어있는 수도사단과 제9사단을 연결시키는 작전으로 국군이 최초로 실시한 군단급 규모의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1972년에 수도사단 기갑연대는 안케고개(deo An Khe) 및 638고지 일대에서 한국군 최대의 격전을 벌여 638고지 일대를 탈환하고 작전을 종료하였다.

  • 월남파병 청룡부대 결단식 장병 가족(1965, CET0031974 11-1) 참고 이미지
  • 월남파병 청룡부대 결단식 장병 가족(1965)
  • 맹호부대 파월 1진 출발전 장병(1965, CET0031975 3-1) 참고 이미지
  • 맹호부대 파월 1진 출발전 장병(1965)
  • 월남파병 시민환송국민대회 화환 증정(1965, CET0031976 4-1) 참고 이미지
  • 월남파병 시민환송국민대회 화환 증정(1965)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전투에서 대한민국 국군은 위용을 떨치며 숱한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1971년 11월 6일 한국과 베트남정부는 단계적 철수에 합의하고, 그해 12월 청룡부대 1만 명의 철수를 필두로 1973년 3월까지 철수를 끝마쳤다. 약 8년여 동안 한국군 총 32만 4천 여 명이 월남전에 참전한 것이다.

국군의 월남 파병은 국방 및 안보분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파병을 계기로 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하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으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었고 미국 정부는 한국군의 파병을 대가로 주한 미군의 계속 주둔을 보장하면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적극 확대했다. 또한, 국군의 월남 파병에 따라 국내에 유입된 외화는 국가발전을 위한 경제·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월남 파병으로 인해 많은 인명 손실이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파병용사들이 있다. 아울러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베트남 양민학살’ 등에 대한 이슈도 조사와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국군의 위상에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과거 월남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해외파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세대들의 막둥이 아들이나 빠른 손자 쯤 되는 젊은 장병들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해외파병의 길에 올랐다.

[대한뉴스 1965] 유엔평화유지군 파병(PKO)(1993, CEN0001934 1-1)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1965] 유엔평화유지군 파병(PKO)(1993)

1991년 걸프전쟁이 발발하자 우리나라는 월남전 이후 최초로 우리 군 자력으로 국군을 파병하였다. 1993년에는 유엔평화유지군으로 상록수부대를 소말리아에 파병하여 헌신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후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본격적인 한국군 파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2000년에는 동티모르의 유엔 평화유지 활동을 위해 상록수부대가 파견되었고, 2002년에는 동의부대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의료지원과 방역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이라크에 2003년 건설공병지원단인 서희부대 파병, 2004년 민사지원 부대인 자이툰부대가 파견되었다. 2007년에는 동명부대가 레바논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였고 2009년에는 소말리아에 청해부대를 파견하였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평화를 지키는 수호자로 그 책임을 다하고 있다.

  • 걸프전 참전 국군 의료지원단 및 공군 수송지원단귀국 환영인사(1991, DET0047066 1-1) 참고 이미지
  • 걸프전 참전 국군 의료지원단 및 공군 수송
    지원단귀국 환영인사(1991)
  • 국제연합 평화유지군 선발대 소말리아 파병환송식(1993, DET0049650 1-1) 참고 이미지
  • 국제연합 평화유지군 선발대 소말리아
    파병환송식(1993)
  • 이라크 파병 자이툰부대 창설식(2004, DET0059476 1-1) 참고 이미지
  • 이라크 파병 자이툰부대 창설식(2004)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군사편찬연구소 정보자료실 베트남전쟁 (http://www.imhc.mil.kr)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회사
  • 신동아, 『개항 100년 연표 자료집』, 동아일보, 1976.
  • 이만열, 『한국사연표』, 역민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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