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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 아시아를 하나로 아시아인의 축제

6.25전쟁의 상흔이 뚜렷하게 남아있던 1954년 대회 출전조차 여의치 않던 시절이었지만 우리나라는 제2회 마닐라 아시안경기대회에 첫 출전을 하게 되었다. 개막 일주일을 앞두고 겨우 선수단이 꾸려졌고 선수들은 비장한 각오로 장도에 올랐다. 개막 이튿날 육상 1,500m에서 최윤칠 선수가 아시아 최고 기록인 3분56초2로 우리나라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당시 한 신문은 “이전 기록을 8초나 단축한 초인간적인 동양 신기록이며 마라톤 선수가 단거리 경주에서 우승한 것은 최 선수가 역사상 최초”라고 극찬했다. 최윤칠 선수는 마라톤이 주종목이었지만, 마닐라 대회에서는 마라톤이 빠진 탓에 중장거리에 도전했던 것이다. 최윤칠 선수는 1,500m에 이어 5000m에서도 은메달을 따는 기염을 토하였다. 밑창에 폐타이어를 댄 신발로 훈련을 했던 최윤칠 선수의 메달 소식은 전쟁으로 메말라 있던 국민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감동을 주었다.

최윤칠 선수를 시작으로 우리나라는 2014년 아시안경기대회까지 모두 1,826개(금메달 617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이 메달에는 선수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오롯이 담겨 있었고, 온 국민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주었다.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 파견 선수단 환영식 썸네일 이미지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 파견 선수단
환영식(1958)
아시아경기대회 출전 선수단 카퍼레이드 썸네일 이미지
아시아경기대회 출전 선수단 카퍼레이드(1974)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 모습 썸네일 이미지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 모습(1986)

아시아의 번영과 도약을 위한 영원한 전진

2014년 9월 19일 '평화의 숨결, 아시아의 미래(Diversity Shines Here)'라는 구호 아래 제17회 인천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렸다. ‘평화의 숨결, 아시아의 미래’라는 구호에는 아시아 각국의 찬란하고 다양한 역사, 문화, 전통, 종교 등을 한자리에서 펼쳐 보이고, 우정과 화합을 통하여 인류 평화를 추구하며 아시아가 하나 되어 빛나는 아시아의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대회에서는 1만3,000여 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해 육상, 수영, 근대 5종, 사격, 양궁, 트라이애슬론, 체조 등 36개 종목에서 총 439개의 금메달을 놓고 겨뤘다. 세계 스포츠계의 공룡으로 자리 잡은 중국은 1982년 뉴델리 대회부터 9회 연속 종합순위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금 79개, 은 71개, 동 84개로 5회 연속 종합 2위를 달성했다. 우리나라는 제2회 마닐라 대회부터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아시아경기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의 몇몇 국가들이 열강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상호간의 이해를 발전시킬 새로운 경쟁을 원했고, 그 방안으로 아시아인을 위한 종합 스포츠제전을 생각해 냈다. 그리하여 1947년 인도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위원인 두트 손디가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아 국제회의에서 아시아경기연명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이듬해 제14회 런던올림픽 기간 중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필리핀, 버마(지금의 미얀마), 인도,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등 6개국이 아시안대회 개최를 합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를 1950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악조건 등 대회 준비 미흡으로 대회 개최는 1년 연기된 1951년에 열렸다. 우리나라는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고 일본 등 11개의 나라가 참여하여 제1회 아시안게임이 개최되었다.

아시아 각 나라들의 우호 증진 및 세계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목적으로 아시안게임이 시작되었지만, 회원국들 간의 정치적인 대립이 종종 문제가 되었다. 1962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4회 대회에서는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출전을 반대하여 이스라엘이 참가하지 못했다. 중화인민공화국 때문에 중화민국의 참가도 제한되었는데, 명칭 문제로 대립을 빚었던 중화민국은 후에 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였다. 개최지 선정도 문제가 있었는데, 1970년 제6회 대회는 우리나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북한과의 마찰로 인해 개최권을 반납하여 방콕에서 열렸다. 1978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8회 대회는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대립으로 방콕으로 개최지를 옮겨서 열렸다. 이런 몇몇 혼란과 대립이 있기는 했지만, 1980년대 들어 아시아경기대회는 큰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특히,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독립국이 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5개국이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OCA : Olympic Council of Asia)에 가입했는데, 이들 나라들은 구소련의 스포츠 실력을 이어받아 왔던 터라 이들의 참여는 아시안게임의 경기력 향상이라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2002아시아경기대회 성공다짐 시민보고대회 개최 계획
2002아시아경기대회 성공다짐 시민보고대회 개최 계획(2000)

현재 아시안게임은 상설기구인 OCA가 국제올림픽위원회의 감독 아래 주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들에게는 금메달 획득시 포상금 120만 원과 병역 면제 혜택이 주어지고 은메달과 동메달 획득 시에는 각각 70만 원과 40만 원의 포상금이 주어진다. 메달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선수로서 대회에 참가하면 15만 원의 포상금이 주어지며 메달리스트들은 소속 연맹이나 협회로부터 포상금도 받는다.

영원한 아시안게임의 영웅들

1954년부터 2014년까지 아시안게임에서 많은 선수들이 피나는 노력과 훈련으로 훌륭한 성적을 거두어 국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 남자로서는 최윤칠 선수가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었으며, 여자 금메달의 첫 주인공은 투포환의 백옥자 선수였다. 백옥자 선수는 제6회 방콕대회 투포환에서 금메달을 딴 데 이어 제7회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불모지에 가까웠던 여자 투포환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같은 해 수영 종목에서 두드러진 실력을 발휘한 선수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조오련 선수는 자유형 400m, 15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수영에서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징크스를 깨버렸다. 조오련 선수는 4년 뒤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2연패의 기염을 토하며 한국 수영 역사의 신기원을 이룩했으며,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1982년 뉴델리 대회는 최윤희 선수를 위한 무대였다. 최윤희 선수는 배영 100m와 200m, 그리고 개인혼영 200m에서 금메달을 따며 우리나라 수영 사상 첫 3관왕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빼어난 수영 실력과 미모로 ‘아시아의 인어’라는 별명을 얻은 최윤희 선수는 요즘 시대의 김연아와 마찬가지로 전 국민의 스타였다.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남자 탁구 대표팀은 당시 세계 최강 중국과 맞붙었다. 1979년 이후 패배를 모르던 중국이었기에 우리로서는 벅찬 상대였다. 한국팀 마지막 주자 안재형은 7번의 동점 접전 끝에 후이준을 2대 1로 물리치고 그대로 코트 위로 쓰러져 버렸다. 5시간 18분에 걸친 결승전 사투로 인해 9시 뉴스도 연기되었다. 또 당시 대표팀 막내 유남규는 세계랭킹 1위 장지아량과의 준결승에서 승리한 데 이어 결승에서 중국의 마지막 자존심 후이쥔을 3-0으로 완파하고 금메달에 따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대한뉴스 제2026호] 아시안게임 대비 대표선수 훈련 모습
[대한뉴스 제2026호] 아시안게임 대비 대표선수 훈련 모습(1994)

한편, 2002년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 농구 결승전에서 우리나라는 신장 229㎝의 센터 야오밍과 ‘중국의 조던’ 후웨이동을 앞세운 중국팀의 공세에 밀려 경기 종료 직전까지 7점차로 뒤지고 있었는데, 극적인 동점골에 이어 연장전에 돌입해 결국 102대 100이라는 2점차 승리를 거두며 높디높은 만리장성의 벽을 넘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격의 박종길과 여자 양궁 김진호는 1978년 제8회 방콕아시안게임부터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까지 연달아 금메달을 따내며 나란히 첫 3연패의 주인공이 됐다. 그 후에도 양궁은 뛰어난 실력을 과시하면서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고, 사격 또한 과학적인 훈련을 거듭해 우리나라 스포츠의 우수성과 잠재력을 보여줬다. 이 밖에도 제9회 뉴델리아시안게임 육상 200m에서 한국인 최초로 21초의 벽을 깬 장재근 선수, 밥보다는 라면을 많이 먹고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다는 임춘애 선수 등이 아시안게임의 영원한 영웅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있다.

(집필자 : 황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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