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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기 싫은 연인들을 갈라놓는 사이렌 소리

매일 밤 10시가 되면 라디오에선 차분한 음악과 함께 여자 성우의 목소리로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라며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시보(時報)처럼 흘러나왔다. 마지막 버스를 타야할 시간이 된 것었다. 밤 11시 이후가 되면 막차와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고, 상가나 술집들도 밤 11시 30분 이전에는 문을 닫아야 했다.

마침내 밤 12시. '애~앵~' 하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거리 곳곳에 철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곧이어 2인 1조 방범대원들의 호각 소리, 타다닥 뛰어 달아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급박하게 들려왔다. 버스도, 택시도 다니지 않는 깜깜한 밤길을 방범대원들을 피해 두 손을 꼭 잡고 뛰던 젊은 연인들도 필시 있었을 것이다. 아내의 출산에 조산소로 달려가던 남편이 경찰에 연행되는 억울한 사연도 보도되었지만, 방범대원에게 잡히면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이나 구류처분을 받아야 했다. 죄목은 ‘야간통행금지법위반’이었다. 잠깐이지만 크리스마스 이브, 석가탄신일, 12월 31일 제야(除夜)에는 통금이 해제되어 모처럼 밤거리가 활기를 찾기도 했다.

성탄절 및 연말연시 야간통행금지 해제 실시 썸네일 이미지
성탄절 및 연말연시 야간통행금지 해제 실시 (1976)
석가탄신일 야간통행금지 해제 썸네일 이미지
석가탄신일 야간통행금지 해제(1977)

야간 통행금지 당시에는 항공기도 김포공항이나 김해공항에 밤늦게 도착하면 착륙을 못해 일본이나 대만, 홍콩, 알래스카, 하와이 등지로 회항하기도 했다. 1971년 발표한 가수 배호의 노래 ‘0시의 이별’은 발표하자마자 금지곡이 됐는데, 그 이유는 ‘남녀가 0시(밤 12시)에 다닐 수도 없는데 헤어지는 것은 통금 위반’이기 때문이었다.

"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삼거리 / 이별 앞에 너와 나는 / 한없이 울었다 /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의 불장난 / 원점으로 돌아가는 0시처럼~". ‘0시의 이별’이란 노래가사에는 통금과 함께 불 꺼지는 거리 풍경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통금시간에 다니려면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했는데, 연인과 이별하기 위해 통행증을 발급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45년 9월 8일 「미군정 포고령 1호」에 따라 치안 및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시작돼 1982년 1월 5일 폐지될 때까지 36년 4개월 동안 시행된 ‘야간 통행금지제도’는 매일 밤 자정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사람들의 통행을 전면 금지하는 것으로, 줄여서 통금(通禁), 야통(夜通)이라고도 불렀다. 처음에는 서울과 인천에만 시행했으나 6.25전쟁 후 1954년 4월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통행이 금지됐다. 1961년에는 통금시간이 밤 12시에서 새벽 4시로 축소됐고, 1964년에는 제주, 1965년에는 충북이 통금지역에서 제외되는 등 지역에 따른 변화가 있었지만, 야간통행금지제도 자체는 1982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통금해제] 야간통행금지 해제 후 국민들의 달라진 의식과 생활 및 사회변화 썸네일 이미지
야간통행금지 해제 후 국민들의 달라진 의식과 생활 및 사회변화(1983)

되찾은 밤의 자유, 야간 통행금지 해제

야간 통행금지는 1981년 12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금해제안’이 통과된 후, 1982년 1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0시부터 해제되었다. 전방 접전지역 등에 내려졌던 통금은 이후에도 상당기간 계속됐으나, 통금이 풀린 지역의 면적을 국토면적과 비교해보면 전체 국토 면적의 약 82%였다.

야간통행금지 일부지역 해제 썸네일 이미지
야간통행금지 일부지역 해제(1986)

통행금지 해제 첫 날 우려했던 귀가전쟁 등은 없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통금 때와 비슷하게 일상을 보냈으나, 자정 12시에서 새벽 4시까지 잃어버린 4시간을 되찾은 시민들 가운데는 잠을 잊은 채 자유를 만끽하며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1월 9일 통행금지 해제 이후 첫 번째 주말 밤에는 서울야경을 관람하는 관광버스 정류소에 서울야경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만원이었다.

[국무회의록] 도서지방 및 관광지구와 외래관광객에 대한 야간통행금지 해제 썸네일 이미지
도서지방 및 관광지구와 외래관광객에 대한 야간통행금지 해제(1966)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을 받아 온 야간통행금지가 시행 37년 만에야 폐지된 것은 1981년 바덴바덴에서 결정된 ‘88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적인 이유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통금을 그대로 둔 채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를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그 때문이다.

통금이 해제되면서 버스와 지하철은 자정 이후까지 연장 운행됐고, 택시 영업도 철야까지 계속됐다. 철야 영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도 속속 등장했다.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큰 혼란 없이 자리를 잡아갔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돌려받은 4시간의 자유’는 37년간 계속되어온 속박의 시간들을 빠르게 지워갔다. 후유증도 있었지만 기대 이상의 경제적 효과도 있었다. 특히 그동안 유보되었던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회복되고, 인신구속 수단이 줄어든 것은 긍정적인 작용이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기대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낳았다.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늘고 얼어붙은 기업 마인드와 소비심리가 살아났다. 비행기의 이·착륙 시간도 구속에서 풀려나 바이어와 관광객의 입국도 늘었다. 1980년 마이너스 0.2%를 기록한 민간소비 증가율이 1982년 6.9%, 1983년 9.0%로 높아졌다. 우리 경제는 1982년 7.2%, 1983년 10.7%라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2차 오일 쇼크와 10.26사건의 여파로 인한 침체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198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24시간 편의점이 들어왔고,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98년 6월 정부는 매장의 심야영업을 전면 허용해 편의점뿐만 아니라 식당, 찜질방, 휘트니스 센터 등도 24시간 영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야간 통행금지 해제와 심야 영업시간 규제 폐지는 한밤에도 활동의 자유를 만끽하는 올빼미 족들로 인해 경제활성화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무렵부터 디스코텍과 카바레, 룸살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대형 폭력조직이 생겨났으며 퇴폐향락문화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에너지 사용량이 증가하였고, 유흥업소의 영업시간 연장으로 향락적인 사회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간 통행금지 해제는 국민의 기본권과 자율성 회복의 상징적인 조치였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국회방송, 「그때 그 법, 지금은 4회-야간통행금지법」, 2014. 1. 9.
  • 동아닷컴, 「책갈피 속의 오늘」, 2004. 1. 4.
  • 손정목,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 일지사, 1977.
  • 송병기외, 『한말근대법령자료집(韓末近代法令資料集)』Ⅱ, 국회도서관, 1971.
  • 심연수, 「야간통행금지제도와 밤 시간의식 형성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 제주일보, 「Review 60 濟州 - 제주의 역사와 함께한 60년」, 2005. 1. 1.
  • 주간매일, 「사투리 플라자- 야간 통금의 추억」, 2006. 1. 1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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