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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한 학문과 해박한 지식은 그만두고라도 조선 글로 편지 한 장 쓰지 못하고 심지어 상점 간판과 정거장 이름 하나 몰라보는 사람이 열의 아홉” 일제강점기 우리의 문맹율을 나타낸 기사의 일부다.

광복 직후 문맹률은 약 78%(12세 이상 대상)였다.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말 사용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동화시키려는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1938년부터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것을 일본어로 외우게 했으며, 일본어를 국어로 배우게 했다. 1939년부터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하여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근본을 없애려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속에서도 우리 말 우리 글을 배우고 지키고자 했던 노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대한뉴스 제348호] 문맹퇴치 운동
[대한뉴스 제348호] 문맹퇴치 운동(1962)

심훈의 ‘상록수’, ‘아는 것이 힘이다!’를 가르치던 실제인물 최용신

2천 만 국민 중 80∼90%가 문맹자였던 1920년대, 1928년 3월 16일자 「동아일보」에는 “어찌하면 우리는 하루 바삐 이 무식의 지옥에서 벗어날까. 어찌하면 이 글장님의 눈을 한시 바삐 띄어볼까…….”라는 기사를 통해 ‘글장님 없애기(문맹퇴치) 운동’을 선언했다. 4월 2일에는 안재홍, 방정환, 최현배, 최남선 등 명사 30여 명의 강연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3월 29일 문맹퇴치운동 금지령을 내리며 막았다. 「동아일보」는 ‘만반 준비가 완성된 금일, 문맹퇴치선전 돌연금지’라는 기사로 맞섰지만, 신문은 압수됐고 문맹퇴치운동은 무산됐다. 1929년 「조선일보」는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했다. 방학 동안 고향에 가는 중등 이상의 학생들을 동원, 전국 각지에서 한글을 가르치게 했다. 「동아일보」도 1931년 7월 16일 ‘제1회 학생 하기(夏期) 브나로드(Vnarod :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운동 - 남녀학생 총동원, 휴가는 봉사적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문맹퇴치운동에 다시 뛰어들었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 지식인들이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농촌계몽운동(브나로드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을 함께 전개한 것을 본받은 것이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동아일보」는 ‘한글공부’ ‘한글맞춤법통일안’ ‘신철자편람’ 등의 한글 교재 210만 부를 배포하며 총 10만여 명에게 한글을 강습했고, 문맹타파가를 보급했다. 1931년 설립된 ‘조선어학회’도 우리 말 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 조선어강습회를 열며 문맹퇴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은 1929년 여름부터 1934년까지 실시했으나 민족 교육운동으로 확대되어가자 1935년 일제가 금지시켰다.

문맹국민 완전퇴치 계획
문맹국민 완전퇴치 계획(1953)

“초가지붕 교실에서 한복을 입은 젊은 여선생을 따라 땟국물이 흐르는 더벅머리 아이들이 일제히 외친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1961년 신상옥 감독의 흑백영화, 최은희·신영균 주연의 ‘상록수’의 한 장면이다. 이광수의 장편 『흙』과 쌍벽을 이루는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1935)는 동혁과 그의 애인 채영신, 그리고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 첫 부분이 “00일보사에서 주최한 학생 계몽운동에 참가하였던 학생들이 돌아와 보고대회를 하면서”로 시작되는데, 여주인공 채영신은 ‘최용신’이라는 실제인물이었다. 최용신 같은 인물들에 의해 ‘문맹퇴치운동’이 이어져온 것이다.

‘없어지는 눈뜬장님, 자라나는 민주 대한’

광복 이후 문맹퇴치운동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과제로 떠올랐다. 야학과 천막학교, 고등공민학교, 재건학교, 새마을학교 등을 중심으로 봉건제도 타파, 도시 빈민·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 농어촌 계몽운동과 함께 문맹퇴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휴전기인 1953년 다음해 총선을 앞두고 문교부에서는 만 17세 이상 문맹자 240만 명을 대상으로 ‘문맹국민 완전퇴치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전국 문맹퇴치 교육공로자 표창식의 현수막에 ‘없어지는 눈뜬장님, 자라나는 민주 대한’이라는 구호가 문맹퇴치사업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1954년 문교부는 ‘작대기식(기호식) 투표 일소(一掃) 및 완전 문맹퇴치’를 목표로 ‘전국문맹퇴치 5차년 계획(1954∼1958년)’을 추진하였다. 주로 성인교육에 치중하여 농한기를 이용하여 문맹퇴치교육을 실시하였다. 1960년대 문맹퇴치운동은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문맹퇴치운동과 대학생들의 농촌계몽활동으로 지속되었다. 1960∼70년대도 가정의례, 식생활, 주거생활, 보건위생, 가족계획 등 생활전반의 개선과 동시에 문맹퇴치 활동을 계속 벌였다.

전국문맹퇴치 교육 공로자 표창식 썸네일 이미지
전국문맹퇴치 교육 공로자 표창식(1953)
대학생 농촌 문맹퇴치 계몽 활동 썸네일 이미지
대학생 농촌 문맹퇴치 계몽 활동(1962)
세계 문맹퇴치의 날 기념식 및 세종대왕상 시상식 전경 썸네일 이미지
세계 문맹퇴치의 날 기념식 및 세종대왕상
시상식 전경(1995)

1960년대에는 이름 석 자 쓰고, 편지를 읽을 수 있으면 ‘까막눈’을 면했다고 했지만, ‘문맹’의 개념이 달라졌다. 1989년부터는 ‘문맹(文盲)’이란 단어 대신 ‘비문해(非文解)’라고 한다. 이제 ‘문맹을 면했다’, ‘비문해자가 아니다’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최소한 신문을 읽고, 도로표지판을 보고, 동사무소에 전출입 신고를 하고, 은행 입출금 정도는 스스로 해야 한다. 단순히 읽고 쓰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문해력(literacy)이라 하며, 선진국에서는 ‘문서해독능력(문해력)’을 중요시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성인 문해 조사’ 결과, 우리나라는 문해력이 최저 수준인 사람의 비율이 38%로 OECD국가 중 하위권으로 나타났다. ‘실질문맹’이란 필요한 정보나 기술을 배울 수 없을 만큼 문자해독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OECD 기준을 적용, 전국 차원의 비문해자 통계조사를 하고 문해교육 특별법을 만들어 문해력 끌어올리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견이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두피디아(http://www.doopedia.c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국경 없는 교육가회(http://www.ewb.or.kr)
  • 『문교 40년사』, 문교부, 1988.
  • 『상록수와 최용신의 생애』, 홍익재출판사, 1992.
  • 『사회교육의 이념과 실제』, 명지대학교 사회교육대학원, 1994.
  •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주)신원문화사, 2009.
  • 『20세기 이야기: 1930년대』, 답다출판, 2015.
  •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16.
  • 동아일보,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 (1) 문맹퇴치 운동」, 2009.10.19.
  • EBS, <한글교육 집중취재 17편> 新문맹시대..초라한 OECD 문해율 성적표, 20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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