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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릴 때마다 가슴 벅찬 감동 애국가

한 시절 매일 듣던 애국가

1970 ~ 80년대 영화 상영 전에 "본 영화에 앞서 애국가를 상영하니 모두 기립해 달라."는 방송이 나오던 때가 있었다. 애국가가 나오면 부동자세를 취하고 일어서는 일은 극장 밖의 일상생활로도 이어졌다. 계절에 따라 오후 5시나 6시 국기하강식 때에는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이어서 '국기에 대한 맹세'가 울려 퍼지면 누구나 가던 길을 멈추고, 오른 손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린 채 서있었다. 1971년 3월부터 1989년 1월까지 계속된 ‘국기에 대한 맹세’ 시간이었다. 이 의식은 1989년 1월 20일 당시 문공부의 발표에 의해 폐지되었다. 문공부는 "매일 오후 5시 또는 6시에 시행해오던 애국가 방송을 1월 23일부터 하지 않도록 방송사에 협조 의뢰하는 한편, 이날부터 영화관에서의 애국가 상영도 폐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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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하강식 및 공연장에서의 애국가 상영에 관한 검토(1988)

우리 국민 누구나 스포츠 경기에서 애국가를 들을 때는 마음이 숙연해진다. 경기 시작 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시작하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우리 선수들이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필승을 다짐하는 모습을 보면 국민들도 선수들과 함께 승리의 의지를 다진다. 세계 1위를 도맡아 했던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가 시상대 가운데에 서고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그 장면을 보는 국민들 모두 김연아 선수와 같은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애국가란 그렇게 국민을 하나로 모으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인 것이다. 애국가의 가사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내용이 담겨 있고, 국가로 제정된 애국가는 나라를 상징하는 의식 음악의 구실을 한다.

애국가 작사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 돼

근대 초기 우리나라의 애국가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갑오경장 이후 각종 애국가가 널리 불리기 시작하여 1896년 무렵 각 지방에서 불린 애국가만도 10여 종류에 이르렀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애국가」를 정식으로 제정·공포하며 애국가를 하나로 정리하려 했다. 이 애국가는 당시 군악대 지휘자 F. 에케르트(F. Eckert)가 작곡한 것으로 1904년 5월 각 학교에도 배포되었으나, 이후에도 많은 애국가가 지어졌다.

지금의 애국가가 나오기 전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를 빌린 곡을 애국가로 부르기도 했다. 1936년에 만들어진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퍼져 있었으나,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우리 국가로 공식 채택되었다.
애국가는 지금도 ‘안익태 작곡’이라고만 돼 있고, 작사자의 성명은 없다. 1955년 주한 미국대사관이 애국가 작사자를 문교부에 문의했는데, 당국은 ‘안창호 작사·안익태 작곡’이라고 답했다. 이 사실이 그해 4월 2일 ‘서울신문’에 실리자 윤치호의 가족이 항의했다. 그러자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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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에 대한 연혁(1973)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는 1,2차에 걸쳐 회의를 열었지만 안창호가 작사가 인지, 윤치호가 작사가인지 결론을 내지 못했다. 안창호·윤치호 합작설, 윤치호 단독 작사설 등이 맞선 가운데 7월 28일 마지막 3차 회의가 개최됐다. 조사위원 19인 중 13인이 출석해 그동안의 사료를 바탕으로 윤치호 작사 확정을 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확정을 미루자”, “돌이킬 수 없는 자료가 발굴될 수도 있다.”는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표결 결과, 11인은 윤치호로 확정했으나, 2인은 유보하자고 했다. 결국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확정은 미뤄졌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최남선은 보고서의 끝에 "1907년 윤치호 작이 진본이라면 애국가 작사가는 윤치호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말을 남겼다.

애국가 작사가를 확정짓기로 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최종회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당시 신문 대부분은 ‘최종회의를 개최하고 무기명 투표까지 한 결과, 결국 희미한 최종결정을 지었다’는 반응이었다. 문교부는 “애국가 작사자를 모르는 것은 우리 문화의 수치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수치”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일부에서는 ‘작사자 미확정’이 ‘작사자 미상’으로 오도되었다는 주장, 윤치호 작사를 결정짓지 못한 데는 윤치호가 친일파라는 이유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을 전개하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을 살았던 애국지사 중 한사람이었으나, 이후 친일파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 안창호와 윤치호 설이 맞서고 있다. 윤치호가 1945년에 자필로 애국가 가사를 적고 '1907년 윤치호 작'이라 명기한 애국가 친필본은 1997년 유족의 기증으로 현재까지 미국 에모리대에 보관 중인데, 여기에는 “1945년 9월 아버지께서 친히 써 주신 것”이라는 딸의 기록도 적혀 있다. 이것을 두고 1907년이 아니라 1945년에 쓰인 기록이므로 위작, 혹은 가치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시민단체 '문화재 제자리 찾기'는 2014년 '애국가 제자리 찾기 100인 위원회 출범식'을 열고, 에모리대에 보관된 윤치호의 자필 애국가 원본 환수 운동을 시작했으나, 아직 환수하지 못하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시절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동지에게 김구 선생은 “우리가 3․1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애국가 가사를 누가 지었는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좋다는 뜻일 것이다. 일부에서는 애국가는 누구 한사람이 가사를 쓴 것이 아니라 윤치호,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창작하고 보급했던 민족의 노래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광복을 맞은 지 70년. 한 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우리 겨레와 운명을 같이해 온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이제라도 사실을 규명해 밝혀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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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과 영광-애국가(1995)

한편, 그동안 온라인상에서 벌어졌던 애국가에 대한 저작권 논란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의 부인 롤리타 안 여사 등 유족이 2005년 애국가 저작권을 한국민에게 무상 양도하겠다는 기증서를 전달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유족들은 기증서에 "애국가가 한국 국민의 가슴에 영원히 불리기를 소망하며 고인이 사랑했던 조국에 이 곡을 기증합니다"라고 적었다. 이로써 애국가는 영원히 한국 국민의 것이 됐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다음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
  • 신동립, 『애국가 작사자의 비밀 : ‘동해물과 백두산이…’누가 지었나』, 지상사, 2015.
  • 연합뉴스, 「애국가 제자리 찾기 100인 위원회 출범식」, 2014. 1. 17.
  •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 음악춘추사, 198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encykorea.aks.ac.kr)